[Opinion] J가 떠난 P의 여행 [여행]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서없이 떠난 여행
글 입력 2022.06.0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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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체 내 일로는 잘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들여다보기 무서워서 책이나 예술에 기대 운다는 말처럼, 우는 경우는 영화를 볼 때, 공연을 볼 때, 책을 볼 때였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자라 담담한 성격이라고 했지만, 담담한 성격은 평범함이 깨질까 두려운 탓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 성적에 맞는 대학에 가고, 복수전공을 선택할 때조차 모든 과정이 담담하게 이루어졌다. 힘들지 않겠냐는 질문에도 통학시간을 어림잡아 보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시작한 통학 생활은 복수전공을 하러 가는 요일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들을 망가뜨렸다. 1교시를 듣기 위해서는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그러고는 7시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야 1교시 수업시간에 맞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고, 피곤에 파묻혀 그 전날과 그 다음날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기차에 몸을 실으면 그제야 김밥 한 줄을 먹을 수 있었다. 이 또한 담담하게 버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삶이 시간이 갈수록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김밥을 뜯다가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 뱃가죽이 등 가죽에 달라붙을 것 같은 허기가 먼저였기에 김밥을 뜯는데, 숨이 내뱉어지질 않고 끕끕거리며 들어오기 바빴다. 기차에 가득한 사람들은 모두 제 할 일 하기 바빴다. 기어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우는 걸 들킬까 입술을 꽉 즈려 물었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우는 와중에도 지나치는 풍경을 평화롭기만 했다.

 

그 감정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짓을 했다. 휴학하면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4학년까지 뭘 해야지 하며 짜여있던 계획에 큰 구멍이 생겼는데도 마음이 편했다. 마음이 지쳐 얻게 된 자기혐오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내 통제 범위 안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성격은 항상 걱정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나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일본으로 여행을 가려는 날짜는 2월 18일이었고, 항공권을 끊은 것은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1일차 유후인


 

그때 당시가 2019년 아주 초반이었기에 MBTI가 유행할 때는 아니었지만, 나라면 하지 않았을 여행을 하고 싶었기에 P처럼(계획 없이) 여행하기가 내 목표였다. 매번 계획을 세우고 살아오던 딸의 이상행동이 걱정됐던 것인지 부모님은 영 탐탁지 않아 하셨다. 걱정에 한 해서는 팔랑귀였던 탓에 또 어느샌가 슬그머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 단위가 아닌 최소한의 계획을 세운 것에 안위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유후인까지 가기 위해서는 2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며, 1시간 버스를 타야 했다. 시간과 계획은 마구 엉클어졌지만, 공항에 앉아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굉장히 평화로웠다. 마치 언젠가 울며 내다보았던 풍경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유후인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유후인 역의 건너편으로는 커다란 산이 보였고, 온천의 도시라는 말에 걸맞게 하얀 수증기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여행의 목적은 계획이 없는 것과 힐링이었고, 더 돌아볼 마음 없이 바로 료칸으로 향했다. 료칸은 방이 야외 온천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노천온천이라고 하기 우스울 정도로 작은 크기였지만, 그랬기에 온전히 내 공간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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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드링크와 함께 온천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손바닥만 한 하늘이 보였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흐린 날씨에 별이 보이지 않는 짙은 파란색의 하늘이었다. 정신없이 보냈던 일상을 벗어나 아무런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는 사실이 묘했다. 평소였다면 오늘 해야 할 것들과 내일 해야 할 것들, 과거에 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를 괴롭혔을 텐데. 자세히 짜인 계획이 없으니 머리를 괴롭힐 생각조차 없었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밤이었다.

 

 

 

2일차 유후인과 히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일본어라고는 인사밖에 모르는지라 고생 끝에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료칸의 사장님도 그랬지만 택시기사님도 참 친절했다. 우산이 없다는 이야기에 선뜻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산을 씌워주며, 무거운 캐리어를 한 손에 들었다. 차를 댄 곳과 역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내 짧은 일본어 실력에 맞춰 대화를 걸어오셨기에 짧게만 느껴졌다. 비를 맞지 않는 곳까지 데려다주시곤 고개 숙여 인사하시는 통에 허둥지둥 같이 고개를 숙였다.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끝맺는 것도 어려웠던 내가 휴학을 하자마자 날 괴롭히던 인간관계를 끝냈다. 일방적인 단절에 가까웠지만 나한테 왜 그랬냐며 따질 힘도, 사과를 받아낼 힘도 없었기에 꾸역꾸역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이후로는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없이 내향적이었고,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문제들을 모두 나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곳에선 사람과 만나는 것이 스스럼없게 흘러갔다. 마치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제 도착한 유후인을 오늘에야 둘러봤다.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였기에 여러 가지를 파는 가게들이 많았고, 볼거리 또한 많았다. 유후인은 커다란 길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볼거리가 모여있었다. 모두들 그 길을 따라서 걸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모든 사람이 가고 있는 길은 가고 싶지 않았다. 큰 길을 두고 강가에 붙어 있는 길로 빠졌다. 강가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그 누구도 없었고, 그제야 일본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나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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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는 애초에 정보가 많이 없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정보가 없다는 것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유후인에서 버스로 1~2시간 거리. 유후인에서는 흐리던 날이 히타에 도착하자마자 맑아졌다. 5시 무렵 도착한 히타는 벌써부터 노을을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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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도 아닌 데다 일본의 다른 도시처럼 유명한 곳도 아니었기에 상점들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손수 만든 인형으로 유명한 마메다마치 골목에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상점의 주인도, 관광객도 한 명도 없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 거리에서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에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잘 정돈된 골목을 둘러보다가 도시를 관통하며 작게 흐르는 냇물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마주한 풍경은 계획 없이 돌아다닌 것에 대한 완벽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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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동백이 기다랗게 줄지어 피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행운은 그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그저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던 내가 처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내가 통제하고 예상한 결과가 아님에도 마음 편히 기뻐할 수 있음에 행복했다. 그 이후엔 가만히 강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따사로운 빛깔들이 푸른색으로 띠고 있는 히타의 집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3일차 후쿠오카


 

유후인과 히타, 후쿠오카 중에서 유일하게 여행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도시였다. 이전에 갔던 곳보다는 좀 더 도시화된 곳이었고, 한국인과 중국인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여기서는 계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과 함께 사라졌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시금 올라왔다. 많은 볼거리들은 버스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보지 못했고, 남는 것은 핸드폰에 쌓여 얼마 보지 않을 사진들이었다.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이면서도 시선이 가는 것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다. 자그마한 샛길을 보면서 우연스럽게 마주할 일들을 마음속에 그렸다.

 

우연과 뜻밖의 일을 지독히도 싫어했으면서 이제는 우연을 기대하고 마음속에 그렸다. 우연을 마주한다고 나에게 크게 해를 끼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고, 계획한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내 손바닥 위에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강박적으로 세워진 계획들을 지키려고 하면, 그 계획이 무너졌을 때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반면에 우연으로 마주한 것들은 너무 큰 행복감을 줬다. 이것이 어찌 보면 더 힘들어진 삶 속에서 P에 가까운 J로 살고 있는 이유이다.

 

 

 

J가 떠난 P의 여행


 

유후인과 히타의 여행이 후쿠오카 보다 많은 걸 남기진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행복했던 감정이 남아있다. 그저 막연하게 행복한 감정이라도 삶에 많은 위안을 줬다. 그리고 그 위안은 다시 삶을 이어나가게 만들었다.

 

J가 떠난 P의 여행은 날 막던 담장을 부수는 것 같은 쾌감을 줬다. 계획에 얽매여 살았던 24시간은 24분이 되기도 했으며, 24일이 되기도 했다. 내 안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아직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날의 풍경들이 지금 내가 마주한 익숙한 풍경들도 특별하게 만들었다.

 

항상 J로 살아왔다면, 강박적으로 계획을 지키려고 한다면, 힐링이 필요하다면 일단 무작정 떠나는 것은 어떨까. 그 안에는 많은 우연히 있을 것이고, 그 우연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우연 속에서 진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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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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