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은 환상인가? [미술/전시]

글 입력 2022.05.2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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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형이 구체적인 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이상형 조건이 생각날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둔 게 쌓인 결과다. 아빠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내 이상형은 환상 속 인물이라고 말한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 사는 수밖에 없다고.

 

환상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이 말은 결국 내가 원하는 사랑이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라는 얘기다. 사실 딱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애매하다. 아직까지 지구에서는 이상형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메모장을 켜서 세어보니 지금까지 30개의 조건들을 써놓았다. 그 중 몇 개 소개하면 ‘착한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 ‘눈빛이 따뜻한 사람’, ‘나를 웃기다고 하는 사람’,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즐길 줄 아는 사람’ 등이 있다.


‘이상형인 줄 알았던’ 사람은 있었다. 살아 있는 눈빛과 재치 있는 유쾌함, 대화가 끊겨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다. 거의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사람을 이상형이라 여겼다. 지금 보니 그냥 이상형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첫인상이 아무리 좋아도 세상엔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였다. 나 또한 완벽하지 않기에 남한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쯤 되니 정말 내가 원하는 ‘사랑은 환상인가?’ 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은 환상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랑을 담은 작품 몇 개를 모아 봤다. 그 시작은 김동규 작가의 거대한 원고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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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사랑의 대서사시를 쓸 수 있게끔 고안된 거대한 원고지》 김동규 2011, 패널에 잉크, 97x194cm

 

 

작품의 내용을 단번에 알아채게 하는 친절한 제목이다. 작가의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한 후 그 글자 수 18,180자에 맞춰 그린 거대한 원고지다. 작품의 크기 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원고지가 파도 치듯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다. 원고지의 칸이 각기 다른 크기로 구불거리는 모습이 노래 멜로디를 떠올리게 한다. 일렁이는 마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법을 마주한 순간이다. 구체적 내용을 담은 언어는 삭제되고 남은 빈 원고지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감각을 환기시키며 공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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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to Love 1》 박혜수 2013, 금색 종이학 1000마리, 유리관, 확대경, 156x88cm, 30x26x27cm, 18x13cm

 

 

금색 종이학 1000마리를 하나씩 펴서 연결한 박혜수 작가의 작품이다. 중고 사이트에서 우연히 헤어진 연인이 선물한 종이학 천 마리를 단돈 6000원에 구매한 것이 작품의 시작이다. 사랑은 떠나고 그것이 지나간 흔적만 남아 이별 후의 감정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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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혀 있던 종이학 천 마리를 다시 펼친 금색 종이에는 한때 찬란히 빛나던 사랑과 고백의 순간이 처절한 상처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 흔적은 너무나 선명해 이어 놓고 보니 하나의 멋진 문양 같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고백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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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 함혜경 2017, 컬러, 단채널,  11’ 27”

 

 

함혜경 작가의 11분 27초짜리 지극히 개인적인 누군가의 이야기, 《나의 첫사랑》이다. 작가는 메모해 둔 단편적인 문장들을 하나씩 엮어가며 이야기를 만든다. 플롯 구조가 아닌 나열된 기록들을 임의로 선택해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작품의 주제가 뭐냐는 질문에 단번에 대답하기 어렵다. 작업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과 마음을 움직인 사건들로부터 파생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누군가의 이야기는 스토리의 단순성에 초점이 맞춰져 하나의 영상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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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은 한 남자가 해변가를 거닐며 보는 풍경들을 관람객에도 보여준다. 그러다 남자는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애절했던 고백, 처음으로 꿈 꾸었던 성공,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것들. 함혜경의 작품은 실제 이야기가 허구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픽션이 실제 경험에 녹아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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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름조차 모르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작가는 “그저 일어난 어떤 일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영상 속 남자를 보며 우정과 만남, 과거와 현재를 생각했다. 작가가 연결한 일상의 일들은 주인공과 나의 정신적 영역에 집중하게 만든다.

 

*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작가의 사적 체험과 내면을 보는 이들과 공유하는 데 있다. 그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엮는 단계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공개적인 장소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정제의 과정도 거쳐야 한다.

 

또 하나 공통점은 이들의 사랑은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흔적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사랑이 완전히 허구의 것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쉽게 말하면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다.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현재를 부족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결국 판타지에 타협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부단히 과거의 기억을 직시하고 현재를 인식하며 성찰과 정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타협 없이 판타지를 현실로 만드는 법이다. 또한 이러한 사적 경험과 생각을 관람객과 공유하는 방식은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의미하다.

 

결국 ‘환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연관된다.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이상을 생각하는 태도는 나의 삶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판타지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 지극히 건조한 생각들은 재미없는 현실 속에 안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도 어쩌면 생각하기에 따라 촉촉할 수도, 괴로울 수도 있는, 생각하기 나름인 일이다.

 

하지만 카뮈는 생각은 정직하지 않지만 감정은 정직하다고 말했다. 생각은 의도하는 대로 꾸며낼 수 있지만 감정은 그럴 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느 무엇보다 선명하게 실재하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 생각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사랑은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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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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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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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햄찌
    • 사랑은 환상인지에 대한 답은 줄 수 없지만, 또만이는 환상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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