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실의 칼이 향하는 곳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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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스포일러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스터리가 왜 재미 있느냐는 질문을 꽤 자주 들었다.
제법 오랫동안 고민했고, 스스로 만족스러운 답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미스터리 소설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누구나 범죄를 저질러 질서를 깨뜨리려는 욕망이 있고,
누구나 흐트러진 질서를 되돌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미스터리는 그 세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장르다.”
– 윤영천, 『미스터리 가이드북』, 한스미디어, 2021, p. 278.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아가사 크리스티가 만들어 낸 명탐정 ‘포와로’, ‘미스 마플’ 등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 등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여전히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고전 추리 소설들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미스터리/추리 장르는 특유의 몰입감과 매력으로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러한 장르는 시간과 장소에 크게 관계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혹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팬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어쩌면 미스터리/추리 장르가 인간이라면 한 번쯤 품어 봤을 다양한 욕망들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그럼에도 진실이 이기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다양한 욕망을 포장하는 거짓들 틈에서, 그럼에도 존재하는 진실과 정의의 자리를 파고든다. 우리는 결국 끝에 가면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함께 진실에 가까워지며 이야기에 몰입하고, 결국 진실이 이기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라이언 존슨(Rian Johnson) 감독의 영화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도 이러한 미스터리/추리 장르의 매력과 재미를 잘 구현한 영화다. 특히 ‘브누아 블랑’이라는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여 대저택을 배경으로 저명한 추리소설 작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고전적인 미스터리/추리 장르가 가졌던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독은 이민자들의 삶과 이민자의 수용과 관련된 논쟁, 페미니즘, ‘젊은 극우’ 등과 같은 현 사회의 이슈들을 뚜렷한 캐릭터 설정과 함께 영화 안에 섬세하게 녹여낸다.
비어 있는 진실 속 구멍들을 채우는 것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전설적인 추리소설 작가 ‘할런 트롬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저명한 소설들을 집필하며 얻은 막대한 재산과 함께 대저택에서 살고 있는 할런 트롬비는, 가족들과 모여 생일을 보낸 다음날 목에 칼이 찔린 채로 발견된다. 싸우거나 저항한 흔적 없이 한 번에 급소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에 경찰들은 자살이라 짐작하지만, 의문의 의뢰를 받고 트롬비 저택에 온 탐정 ‘브누아 블랑’은 타살의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리고 할런의 죽음과 그의 가족들을 둘러싼 진실을 밝혀 나간다.
여기까지라면 고전적인 추리 장르의 화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설정이지만, 영화는 ‘마르타’라는 인물의 시선을 비추며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마르타는 할런의 간병인이자 유일한 친구였고, 거짓말을 하면 구토를 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졌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진실에 가까워 보이는 인물이지만, 불법체류자인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할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의 실수를 숨긴다.
"그럼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의 단편들만 말해. 정확한 순서로."
할런은 죽음의 위기에 있는 순간에도 마르타에게 알리바이를 만들 방법을 알려주며, 거짓말을 못한다는 마르타에게 ‘진실의 단편들’만 말할 것을 조언한다. 할런의 조언에 따라 마르타가 이야기한 ‘진실의 단편들’은 ‘거짓’은 아니었지만, 온전한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영화는 이렇게 ‘진실’과 ‘거짓’ 사이 미묘한 사실들을 조금씩 던져주며 브누아도, 마르타도, 관객들도 점점 진실에 다가가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완전한 진실이라 믿었던 것 속에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렇게 밝혀진 진실 속에는 악의와 선의, 오해와 오류가 뒤섞여 있었고, 이 때문에 '진실'과 관계된 의도와 결과가 뒤틀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실’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역시 ‘진실의 단편’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지,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브누아의 표현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진실’은 말그대로 온전한 ‘진실’로만 꽉 차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도넛’처럼 복잡한 감정과 욕망, 의도와 결과가 뒤섞여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비어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진실에 다가간다는 것 역시 진실 가운데의 그 구멍을 또 구멍이 뚫린 도넛들로 계속해서 채워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진실을 끊임 없이 살피며 진실에 계속해서 다가가는 통찰력이, 자신 앞에 다가온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는 용기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수사법도 그렇죠. 아무런 편견없이 사실들을 관찰한 후
포물선의 경로를 밝혀내고 종착점으로 유유히 가보면
진실이 내 발 앞에 떨어집니다."
브누아 블랑은 그의 말처럼 편견 없이 사건 관계자들을 대하고 진실의 흔적을 찾아간다. 만약 그가 다른 가족들처럼 돈에 대한 욕심이나 이민자에 대한 편견으로, 마르타를 범인으로 몰거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진실을 밝히긴 어려웠을 것이다. 또 마르타 역시 결국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스스로 털어놓으며 자신이 한 행동을 책임 지려는 선택을 했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
할런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이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마르타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진실은 항상 원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지는 않는다. 할런은 가족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자신이 베푼 것을 통해 성장하길 바랐지만, 오히려 가족들은 할런의 재산을 욕심내고, 그를 이용하기도 했다. 할런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 진실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고,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해왔던 지원을 끊는 결단을 내린다.
"옳고 그름의 모호한 경계는 진실이 아니라 찾아낸 진실을 쓰는 방법에 있죠."
이처럼 진실을 밝혀내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 못지 않게, 그 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다루어 내는지도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그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칼자루를 쥐게 하는 힘을 준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이라는 제목처럼 자신 앞에 놓인 진실이라는 칼을 빼 들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것인지 진실을 가려왔던 악의와 거짓의 고리를 끊어낼 것인지는 결국 진실 자체가 아닌 칼을 쥔 사람의 선택이다. 그리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은 결국 후자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비어 있는 진실 속 구멍들을 채우는 것은, 편견과 악의 없이 제대로 진실을 마주할 용기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진실을 통해 이루어 낸 것들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선(善)’이나 ‘정의(正義)’라는 거창한 이름을 바라기보다, 진실을 마주한 순간 순간 ‘옳음’을 향해 가려는 수많은 선택과 고민들이 모여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렇기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흩어진 진실의 파편을 마주할 우리가 한 선택과 고민들도 조금이나마 진실 속 구멍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이길,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선택과 고민들이 모여 끝내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선한 사람이 이기는 방식
언젠가부터 ‘착하다’는 말이 더 이상 긍정적이게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착하다’는 것은 이용하기 쉽고, 속이기 쉬운 사람들의 특성이 되었고, 심지어 악한 사람들을 상대하고 이겨내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약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착한 사람이기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에’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할런이 자식들에 대한 지원을 모두 끊고, 자신의 유산을 모두 마르타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이 공개되자, 마르타에게 ‘가족’과 다름없다 이야기하던 트롬비 가족들은 마르타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마르타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가지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돈에 대한 욕심보다는 할런의 뜻을 먼저 생각한다.
할런의 재산만 탐하며 정작 그를 존중하지 않았던 가족들과 달리, 마르타는 할런의 생각과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그를 지지해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이런 마르타였기에 할런이 그가 평생 동안 이루어 내고 남은 것들을, 심지어 다른 가족들의 미래까지도 마르타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영화의 마지막,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가 쓰여 있는 할런의 컵을 들고 테라스에 서 있는 마르타와, 집 밖에서 그런 마르타를 올려다 보는 트롬비 가족들의 모습은 잔잔한 분위기에도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 이렇게 결국 마르타가 트롬비 가족들을 ‘이기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트롬비 가족의 위선적인 모습을 꼬집고, 이들과 마르타가 서 있는 위치를 단번에 전복시키는 낯설지만 통쾌한 장면을 그려낸다. 선과 악의 구도로만 나눌 수는 없겠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인 이슈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이처럼 할런의 유산을 둘러싼 트롬비 가족과 마르타의 대립 외에도, 영화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요한 골목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착한’ 마르타였기에 할 수 있던 선택들이 이야기의 방향을 확확 바꿔 놓는다.
마르타는 할런이 남긴 유산을 받지 못할 수 있을 뿐더러 할런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할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비난하고 협박했던 트롬비 가족들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사과하려 했다. 또, 자신의 잘못을 밝힐 유일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정부 ‘프랜’의 목숨을 구하려고 한다. 그렇게 마르타의 양심과 선함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오히려 ‘완전 범죄’를 꿈꿨던 누군가의 계획을 흔들어 놓고, 그를 이길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이건 기억해 둬요. 아주 중요한 거에요. 당신은 이겼어요.
할런의 방식으로 이긴 게 아니라,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할런의 죽음에 관한 모든 진실의 파편들이 맞춰진 후, 브누아 블랑은 마르타에게 ‘마르타만의 방식으로 이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르타가 지닌 선의와 따뜻한 마음이 결국 마르타가 이길 수 있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강한 것이 아니라, 예상을 뒤엎는 선의와 무심코 행한 정의가 모여 만들어 내는 우연과 필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인의 계획을 모두 뒤엎어 버린 마르타처럼 말이다.
그러니 착하다는 것, 선하다는 것은 악(惡)함을 상대할 수 없는 ‘약(弱)함’이 아니라,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과 방식을 뒤바꾸고 더 나은 사회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한다. 물론 현실은 탐정소설이나 추리소설과 같지 않아서, 대단한 능력과 막강한 영향력을 동시에 지닌 개인이 명쾌하게 진실을 밝히고 악인을 단죄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조금은 느리고 당장은 바뀌는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결국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큰 힘을 발휘하며 생각지 못한 것들을 이기고 마는 것은 따뜻한 마음으로 ‘조금 더’ 선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내가 한 수많은 선택들을 뒤돌아 보며, 영화 속 마르타의 선택들을 곱씹어 본다.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선택들이 조금은 더 선한 쪽을 향하고 있기를, 누군가를 해치거나 무언가를 파괴하기 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본다.
“무자비한 악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존재들이지.
우리는 대개 악한 것은 강하게 선한 것은 약하게 생각하지만
끝없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은 선을 택하는 자들에게서 나온다네.
나는 그 힘이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네.”
– 루시드 작가 웹툰, <야생천사 보호구역> 63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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