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작은 숲의 플라뇌르

먼지를 닦아내고 맑고 명확하게
글 입력 2022.05.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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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다! 하면 – 고기와 채소를 노릇하게 굽고, 된장찌개를 끓여 먹은 다음, 알차게 과일까지 챙겨 먹는 우리가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뚝딱 요리를 해내는 G양 덕분에,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 같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중이다. 며칠 전은 여느 때처럼 식사를 끝내고 창가를 바라보던 날이었다. 후식으로 조금 묽은 수박을 베어 물면서 ‘여긴 과일이 참 맛있어’라는 이야기를 꺼내려다, 문득 나는 ‘맛있다’ ‘예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걸 깨달았다.


분명 한국에서는 선명도가 낮았던 맛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거짓말처럼 해상도가 높아져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싱싱한 과일과 맛난 음식은 한국에도 늘 넘쳐나는데, 왜 나는 굳이 이곳에서 더 달콤하게 이 맛들을 느끼는 걸까.

 

이유를 생각하려다가, 한 라디오에서 들은 걱정을 하느라 사탕의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예를 들면 ‘이 사탕을 왜 준 걸까.’, ‘이걸 먹어도 되는 걸까.’  또는 ‘이 사탕을 먹고 난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등등의 걱정 때문에 사탕의 단맛을 100% 맛보지 못한 한 아이의 이야기였다.


나도 이 아이처럼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시간이 되면 알 것들을, 아직 오지 않는 순간까지 굳이 붙잡아 사탕의 단맛을 쓴맛으로도 바꿔버리고도 남았을 사람이었다. 사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도 먼지처럼 걱정이 쌓이고 쌓여있었다. 아마 ‘현재’가 아닌 현재가 주는 성취감에 목을 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은 임용고시에 붙지 못하고 시골집으로 도망간다. 몇몇 관람객들은 ‘영화는 현실이 아닌 영화’라는 평을 내렸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평에 동의했다. 아마 혜원은 임용을 다시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서둘러 마음을 추스르고 서울에 올라가야만 했다. 현실은 그렇게 냉정한 법이라며 말이다.

 

그런데 그 현실을 마주하기 전에 혜원은 도피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다시 일어설 에너지를 얻기 위한 도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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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이, 그 만의 작은 숲이었다.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때로는 상황에 맞서서 해결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전엔 다시 에너지를 보충하려 잠시 쉬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즉 각자의 '작은 숲' 같은 도피처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프랑스어 중 ‘플라뇌르’라는 단어는 사색의 의미에서 ‘산책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의도적인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을 예쁘게 포장한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 역시 나만의 '작은 숲'을 거닐 '플라뇌르'가 될 필요가 있었다.


*


이곳 생활을 하며, 예상하지 못할 미래를 걱정할 필요 없이 현실에 맞추어가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며 현재에 행복을 맞추는 법을 드디어 배웠다. 미국에 온 첫 달 생활은 ‘무료함’ 그 자체여서 종종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한국에서처럼 많은 과제나 여러 개의 대외활동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도 금지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매일 여유로운 일상은 아니더라도 처음 겪는 낯선 일들을 잘 웃어넘기며 해결하는 태도, 조금 귀찮더라도 끼니를 잘해 먹는 건강한 루틴, 그런 싱거운 요소들이 오히려 내 삶의 깊은 맛을 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외 살이에서 배운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법은 훗날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임을 알고 있기에,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그래서 오늘 밤은 아마 애정하는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들으며 책 한 권을 읽을 것 같다. 따뜻한 우유 한 잔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이 사 온 초콜릿을 조금 곁들여 먹으면서 말이다.


ps. 항상 함께해 준 사랑스러운 G양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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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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