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소한 유서 쓰기 [문화 전반]

죽음과 삶에 나답게 다가서 볼 수 있는
글 입력 2022.05.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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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중에 잘 살아야 해~?’


엄마가 어느 밤 장난에 진심을 살짝 얹은 어조로 건넨 한 마디가 괜히 머리를 맴돌았다. ‘나중에’와 ‘잘’ 사이엔 숨은 말이 존재한다. 이별과 죽음이다. 죽음이라니.


죽음은 내 세상과 크게 관련 없는, 마치 평행세계의 존재인 듯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뉴스 속 ‘사망’이라는 글씨가 너무 흔해진 탓일까. 그런가 하면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죽음을 맞닥뜨리면서 허망함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내 삶과 맞닿은 지점에서 목소리를 내고 손가락을 움직이던 이들이, 사회에서 외면당한 이들이, 멀리서 서로를 모르지만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이들의 죽음이 그렇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무래도 죽음 앞에 선 이들은 자기 의견을 온전히 피력하고 수행하기 힘든 것 같다. 그 말이 쉽게 가치 절하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주변으로부터 예외 없이 들은 이야기가 있다면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뭘 하고 뭘 하지 말고’ 따위의 말이다. 이 말이 왠지 당사자에겐 가닿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오히려 반대가 맞지 않나? 죽기 전인데, 그때까지도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뭔가를 행하고 포기해야 하는 건가?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죽음을 넘어선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그의 삶은 살면서 거쳐 온 치열한 고민과 수행이 무색하게 쉽게 대상화되기 마련이다. 이런 경향을 보면 ‘죽음’과 ‘능동’이란 단어는 조화롭기 어렵다는 걸 느낀다. 나의 의견이 배제된 채 나의 죽음이 다뤄진다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기도 하다. 능동적인 죽음이란 없는 걸까?


잠깐 떠오른 예시가 있다. 최근 관심 있는 아티스트의 가족 부고가 있었다. 아티스트는 어떻게 하면 죽은 이가 그답게,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에 죽은 이가 가장 아꼈던 아티스트 본인이 당당히 상주가 되었으며, 죽은 이가 평소 좋아하던 물건으로 빈소를 꾸몄고, 죽은 이가 활동했던 댄스팀의 멤버들이 빈소 앞에서 춤을 췄다. 마치 영화 <써니>처럼 그를 진정 존중했기에 가능했던 모습은 묘하게 감동과 웃음이 스며든 미소를 띠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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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고 있자니 어떻게 하면 나답게 적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문득 떠오른 건 유서다. 아무런 말도, 결정도 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서 유일하게 나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래도 유서가 아닐까? 그렇다. 유서야말로 죽은 이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일 수 있는 창구인 것이다. ‘가는 데 순서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대개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미리 유서로 대비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사실 유서라고 다를 건 없는 것 같다. 결국 유서도 메모, 기록의 한 종류이다. 유서를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밝히고 싶은 내 생각과 상태, 수행했던 것들, 원하는 죽음 이후의 처리 등에 대해 작성하는 것이다. 계속 갱신하며 쓰는 일기장이자 스스로 기록하는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유서는 죽음만을 향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삶을 보살피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감정과 상태를 톺아보고 간추려 적어내며 현재의 자신을 진단하는 도구가 되고, 그 속에서 나아가고 싶은 출구를 발견할 수 있는 힌트가 될 수 있다. 죽음을 가꾸는 건 무엇이 됐든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죽음을 마주할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말을 유서에 적어야 할까. 유서 앞에선 과연 솔직할 수 있을지, 여전히 기록되고 싶은 모습으로 꾸며낼지는 알 수 없다.

 

 

 

나의 기록


 

우선 자신을 ‘나답게 살고 싶은 용기 없는 자’라고 기록하고 싶다. 은연중 사람은 항상 성장한다고, 성장해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사회적인 자아에서 그러하다. 소위 ‘큰’ 회사, ‘좋은’ 회사 들어가면 경사는 맞다.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겠다. 그러나 배부르게도 난 항상 크고 거대한 조직은 무섭고 부담스럽다. 스스로 ‘작은 그릇’이라고 생각해서다. 작은 게 다른 건 아니다. 나란 존재는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저선이 낮고, 가장 만족을 느끼는 최고 한계선도 낮다는 의미다. 적어도 현재의 나는 그렇다. 그래서인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을 외치는 세상이 버겁기도 하고, 쉽게 공감할 수도 없다.

 

말인즉슨 사회적 성취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만족감에 한계가 있으니 높은 사회적 자아를 쟁취하지 않아도 내 삶은 전혀 아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에겐 지나치도록 개인적인 자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용기가 없어 항상 망설이고 결국 큰 흐름을 따라가려 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지금의 나는 그런 용기를 얻기 위한 과정에 있기도 하다. 글을 쓰다가 적절한 문구를 발견해서 용기를 더 얻은 참이다. 혹시 이 글을 보게 될 이들도 그러하길 바라며 적는다.

 

‘의아함은 그들의 몫, 나는 나다운 걸 하자.’(유튜브 채널 <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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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우선 단연코 자연을 사랑한다. 가끔 보러 가면 좋다 정도가 아니라 항상 옆에 있어야 하는 존재다. 그중에서도 숲을 좋아한다. 그 속에 한없이 위로 뻗은 나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가지를 채 가리지 못하는 몇몇 잎사귀 꾸러미만 무성한 나무, 유난히 연둣빛에 가까운 5월의 나무, 그 속을 훤히 드러내는 가을 겨울의 앙상한 나무, 지는 햇빛을 받은 모든 자연 사물을 좋아한다. 나에겐 이런 자연을 지키는 게 참 중요한 과제다.


또 스스로 사랑하는 것 같다. 날 만족시키는 게 어렵지 않으니 나 같은 친구도 나쁘지 않다. 데리고 살아도 큰 문제가 없다면 되도록 사랑해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콧대가 높아도 타인에겐 보기보다 의존적이다. 이 정도면 혼자 살기의 달인이라고 생각이 들다가도 결국 내 주변 존재들이 없다면 무가치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가까운 이의 상실이 두렵다. 그들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살아가겠지만 왠지 무섭다.

 

문득 내가 그런 존재가 되기도 할까 궁금하다. 그런 분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대해 적어도 안타까운 감정은 안 가지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죽는 것 왠지 무서울 것 같고 상상이 안 가는 아득한 영역이다. 하지만 언제 죽든 안타까움이란 감정은 나에게 없을 것이다. 그저 평탄하게 기쁘고 화나고 아프고 슬프고 무감하게 흘러가는 게 나의 삶이니까. 난 언제든 지금 누리는 것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정해져 있다 해도, 그전까지 소소함을 사랑하며 여전하게 살 것 같다. ‘그럼에도 살아갔을 것 같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부의 말도 전해볼까. 장례식같이 나의 죽음과 관련한 의례와 만남에서 동물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채식은 나의 생활방식이었기에 아쉬워도 남에게 모든 순간의 채식을 강요할 순 없다. 나도 그러지 못했고. 다만 나를 중심에 둔 만남, 나의 지난날을 기념하고 회상하는 자리에 동물이 이용되는 건 반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죽음이 또 다른 존재의 죽음을 가져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적어보니 나란 존재가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여실히 깨닫는다. 젊지만 그래도 20년을 훌쩍 넘게 살아왔는데 할 말이 이거밖에 없다니 조금은...아니다. 앞으로 갱신하면 되니까 아쉬워하지 않겠다.


글을 쓰며 더 확신했다. 유서는 죽음을 위한 준비고 이는 다시 삶을 향한 준비가 된다. 죽음과 삶이 분리될수록 오히려 각각의 색채는 옅어지는 듯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엄숙함과 같은 말인 것 같다. 엄숙함, 슬픔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 안엔 분명 편안함, 웃음도 섞여 있다. 죽음은 순간만이 아닌 긴 과정이기에 그 속에 자연히 무수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단일하게 해석되는 건 건강하지 못한 것 같다. 삶과 죽음에서 풍부한 포착을 하고 싶다. 아무래도 소소한 유서 쓰기를 계속해야겠다.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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