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태일이', 타오르는 슬픔의 초상 [영화]

글 입력 2022.05.0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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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jpg

ⓒ 영화 '태일이', 2021

 

 

노동자의 날을 기념해서 본 영화 '태일이'. 오늘 태일이를 볼 거라고 했을 때, 누군가 영화 제목인지 모르고 무척 친근하게 부른다고 생각해다는 말에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태일이. 아마 영화도 그 친근함을 의도한 게 아닐까.


돈이 없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이리저리 돈을 벌며 애쓰다 이제서야 모두 함께 살게 된 태일이네 식구들. 큰아들인 태일이는 미싱 일을 하다가 나중에 공장도 차릴 수 있고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재단사가 되기로 했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바라던 대로 재단사가 되어서 탄탄대로가 될 것 같았던 그에게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갑작스럽게 같이 일하던 직원이 폐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태일이 병든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돈을 모아 병 치료에 보탬이 되라고 전해주는 건 그럴 수 있다고 하자. 정이 많아 전부터도 어린 견습공들에게 간식도 사주고, 일도 같이 나눠서 했으니까. 거기까지만이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님은 그녀에게 치료비를 주기는커녕 해고했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이니 쓸모가 없어서였겠지.


뭔가 잘못되었다고 깨닫고 나서부턴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어느새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고, 좁은 곳에서 먼지를 마시며 건강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었다.

 

태일은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법에 명시된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고 건강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었다. 이런 법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시간이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정리한 실태조사 결과는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신문기사로 잠시 길이 보이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거라는 전략, 이념적인 프레임을 씌우면서 본질을 흐리는 전략에 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시위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제지당했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되레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 다쳤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한 글자 한 글자 찾아보며 곱씹은 근로기준법을 태우기로 한 날, 속만 까마득하게 타들어가다가 선택한 길은 스스로를 함께 불태우는 것이었다.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고 나서야 근로기준법을 준수해달라는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졌다.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을까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그의 노력이 실패하거나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고 꿈만 좇았더라면 그는 공장을 차리고 사장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공장과는 다르다며 너도 나도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되진 않았을까. 먹고사는 걱정 없이, 동생들도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진 않았을까. 가족만 생각하기도 벅찬 삶이다.


그럼에도 그가 마음을 바꾼 건 미래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달라지지 않는다면 영영 사라져버릴 이들이 마음에 걸리고 아파서 꿈마저 뒤로했다.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겠지만 그 선택을 하기 전 누구보다 외롭고 혼란스러웠을 한 사람이 안쓰러웠다. 동시에 아찔했다.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한참 늦게 우리에게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날 타오른 건 일하는 사람들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체념과 절망, 슬픔이었다. 이대로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하루 중 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슬픔. 일하는 사람이 한 번쯤은 어떤 방식으로든 느껴보았을 괴로움.

 

오늘은 그 모든 것을 느낀 사람들을 위한 날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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