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광인을 만드는 사회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5.0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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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 번이라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한 경험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병들게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부정적으로 바꿔놓는지. 더 나아가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당신을 제외한 대다수가 당신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면, 충격과 인간에 대한 불신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보는 것, 그 속에서 여러 어려움에 시달리는 것, 그리고 내가 그걸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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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일기’ 속 ‘일기’ 부분은 주인공 모(某)군 형제 중 동생(이하 ‘광인’으로 칭하겠다.)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잘 드러낸다. 그는 ‘식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 속,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광인은 사람들의 식인 행위를 경멸함과 동시에 그들이 자신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러한 두려움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뻗쳐, 형조차도 자신이 죽어 그들의 먹이가 되길 바란다고 여긴다.

 

‘식인행위’에 관한 광인의 두려움은 실제 사건과 그가 목격한 수많은 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생각하는 인간성과 동떨어져 있는 ‘식인 행위’ 때문에 광인은 세상에 관한 믿음을 잃고, 자기 방어적으로 경계심이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소한 의견 차이에도 깊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게 인간인데, 가치관의 엄청난 차이에 더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면 얼마나 더하겠는가. 따라서 광인은 ‘서문’에서 나온 것처럼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적응하지 못해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그러한 경험을 한 것이라고 본다.

 

 

 

누가 광인인가



그렇다면, 왜 이 일기의 제목은 ‘광인일기’이며, 광인 이외의 모두가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까? ‘서문’에 보면, 이 일기의 제목은 광인이 병(피해망상증)에서 벗어난 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식인 행위’와 그것의 위협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광인이 정신병을 앓으며 이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광인이 중증을 앓아 모두가 그를 병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으며, 병에서 나아 후보가 됨으로써 사회에 다시 편입된다는 서문의 결말과도 나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다른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이는, ‘광인’은 모 형제의 동생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며 결국에는 사회가 그를 억누르고 승리했다는 것을 제목을 통해 표출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즉, 글의 서두에서 전제했던 것처럼, 광인은 식인 행위를 목격한 경험을 통해 분노와 두려움을 지닌 상태에서 이 글을 썼는데, 그가 가진 의문 자체가 사회에서 터부시되며 ‘비정상’ 혹은 ‘미친 생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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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일기의 두 부분인 ‘서문’과 ‘일기’는 각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시점에 있어서 아주 큰 차이를 가진다. ‘서문’은 100퍼센트 외부의 시선인 데 반해, ‘일기’는 100퍼센트 광인이 혼자서 내면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그리고 ‘서문’은 먼저 등장하지만 시간적으로 ‘일기’보다 늦다는 점에서 결국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서문’에서 광인이었던 사람이 스스로 이 이야기의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과 후보가 되어 이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여겨진다. 그 이유는 외부의 시선이라 진위 판별이 어렵다는 것이다. 광인이 후보로 다른 지방에 갔다는 이야기도 조금 미심쩍다. ‘예비’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과 ‘나’가 ‘며칠 전’에 소식을 들을 정도로 병의 증세가 최근의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완치를 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갓 나은 사람을 타지로 보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군다나, ‘서문’은 식인 행위를 끝까지 반대하였던 ‘일기’의 결말과는 너무나 다르다. 혹시 광인은 진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잡아먹혔고, ‘후보’는 그의 부재를 둘러대기 위한 말이 아닐까? 아니면 광인이 아직도 식인을 혐오하지만, 이를 숨기고 다른 사람과 생각이 같은 척, 사회의 다수인 척을 하며 그 마을을 빠져나온 것이 아닐까?

 

 

 

사회와 개인, 사회 속 개인



광인일기 속 외부의 시선으로 규정되는 광인, 그리고 광인으로 규정되며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사회 속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느꼈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 속에 살아가며 시대와 위치에 맞는 신념, 행동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정당화하는 교육을 받으며, 때론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때론 논리적으로 합리화하며 이에 순응한다. 모두가 조금씩은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체제를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심한 반감을 가진 사람은 드물며,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긴 하지만 지금이 ‘최선’이라고 타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기에, 조금 다른 체제와 다른 생활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며 심지어는 배척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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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이 절대적으로 틀리지는 않다. 또한, 그들의 말은 ‘문지방을 하나 넘는 것’처럼 작은 생각의 전환일 수도 있다. 하물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식인’만큼이나 부당하게 여겨지는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바로 묵살된다. 심지어는 그들의 목소리가 언론 등 타인에 의해 전달되며 왜곡되고, 그들이 억압받는 현실은 은폐된다.

 

이렇듯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광인’으로 취급받는 것은 ‘다른’ 것들을 타자화하려는 심보 때문이며, 지금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인이 구하려는 아이들은 아직 기존의 사회에 물들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교육받지 않은 백지의 존재들일 것이며 광인이 만나기 어렵다고 말하는 ‘진짜 사람’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자신의 기준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행동하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글의 형식에서 드러나는 사회와 개인의 간극, 글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폭력성을 통해 광인일기는 우리 사회 체제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고전일 수 있는 이유는 담백한 형식으로 소개하는 하나의 일화가 모든 시대와 사회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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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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