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존재는 무엇이 증명하는가 - 스메르쟈코프

글 입력 2022.04.1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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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다. 나이, 생김새, 취향, 사는 곳 등등 너무나 다른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존재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런데 어른이 될수록 개개인을 구분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똑같이 유행하는 옷을 입고 똑같이 사고하려 노력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보다 남과 비교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나의 정체성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사장 위 낙서처럼 흐릿해진다. 이렇게 희미한 우리의 정체성을 그나마 구분해주는 것은 이름이다. 우리는 모두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주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가 규명된다.

 

여기, ‘수증기’라는 뜻의 ‘스메르쟈코프’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내, 아니 세 사내가 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발작을 일으키며 쉼 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기 위해 절규한다. 그의 길고도 험난한 존재 찾기 여정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속으로 자문했다.

 

나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 증명해주는 거지?

   


[스메르쟈코프] 메인포스터.jpg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뮤지컬 <스메르쟈코프>는 또 다른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스핀오프 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브라더스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원작으로, 망나니로 악명 높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를 증오하는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중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의 네 번째 아들이지만 어머니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버려진 자식이라 세 형과는 다르게 정식 아들이 아닌 부하의 역할을 지닌 인물이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형제에 속하는 건 오로지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뿐이다. 그래서인지 스메르쟈코프는 너무나 당연하게 살인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세 형제가 가족에 대한 증오로 몸부림치는 동안 그들 사이를 맴돌며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 스메르쟈코프는 그의 이름처럼 정말 수증기와 같은 인상을 지닌다. 표도르의 아들인데도 형제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무시 받는 게 일상인 스메르쟈코프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본 관객들에겐 끝까지 수수께끼의 인물로 인식된다.

 

<스메르쟈코프>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인장이 강한 작품이다. 따라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관람 여부에 따라 감상의 많은 부분이 좌지우지된다. 필자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본 적이 있다. 그 덕분에 추상적인 대사 위주의 불친절한 진행에도 내용의 많은 부분을 수월하게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다. <스메르쟈코프>는 본 작품에선 다뤄지지 않았던 스메르쟈코프의 복잡한 내면이 상세하게 그려지는데, 그의 핵심적인 고민에는 표도르와 이반이 있다. 표도르는 스메르쟈코프의 아버지지만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된 양육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를 아들이 아닌 부하로만 취급했다. 반대로 이복형에 해당하는 카라마조프 가문의 둘째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에겐 동경의 대상이다. 폭력적이기만 한 드미트리와 이상적이고 성스러운 알료샤 사이에서 신의 존재를 반박하고 자신의 이성을 믿는 이반은 스메르쟈코프가 닮고 싶은 롤모델이다.

 

표도르를 향한 그의 증오와 이반을 향한 동경이 동시에 표현된 새로운 모습의 스메르쟈코프가 전보다 훨씬 입체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이 뮤지컬을 통해서 악독한 표도르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세 형제 주변에 머물면서 그 역시 얼마나 혼란스럽고 외로웠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 불쾌한 말투, 자주 일어나는 간질 발작 등 의문투성이였던 그가 어머니는 존재조차 모르고, 아버지와 형들에겐 가족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삶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는지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수증기처럼 인물들 곁을 맴돌기만 했던 스메르쟈코프는 <스메르쟈코프>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 관객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

   

 

 

믿음이라는 허상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와 <스메르쟈코프> 모두 종교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셋째 알료샤는 독실한 신앙심을 안고 살아가고, 이반은 그런 알료샤에게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반박한다. <스메르쟈코프> 역시 신에 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과 더불어 무대 중앙에 배치된 성모마리아 상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고 가르침을 지키며 이를 따르는 일’을 말한다. 많은 사람을 한 가지 목표로 집결시키는 데는 다 같이 믿는 대상만 한 게 없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인류는 국가를 다스리는 데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종교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까지 결정짓기 때문에 지도자의 입장에선 이를 일치시켜야 수월하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 훗날 사람들의 관념까지 지배하는 종교는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전쟁까지 일으키지만 말이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믿음에 관해 상반된 태도를 취하는데, 자신의 이성을 믿는 이반은 절대적으로 무언가를 숭배하는 행위 자체가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이반에게 알료샤는 끝까지 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들을 결집시켜왔고 사람들은 종교로 모인 무리에서 소속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소속감이 곧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그렇게 증명된 존재가 정말 너를 나타내는 게 맞는지 묻냐며 또 다른 견고한 믿음, 가부장제를 건드린다. 가부장제에서 보통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장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부친살해라는 극적인 소재는 절대적인 믿음에 반기를 든다는 점에서 작품의 주제와 맥을 같이 한다.

 

스메르쟈코프는 언제나 절대적인 믿음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스메르쟈코프>의 초반,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은 이들의 재물을 훔치기 위해 무덤을 파라는 묘지 관리인에게 계속해서 자신이 왜 그래야 하냐고 묻고, 억지로 들어간 요리 학교에서 귀족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라는 지시에도 납득 가능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묻는다. 요리 학교의 선생이 서민의 비천함이 있어야 귀족의 영예로움이 빛나는 거라고 답하자 그렇다면 신은 악이 있어야 숭고한 것이고, 그러니 신이 악을 만들었냐는 파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전적으로 이반의 생각이다. 여기서 스메르쟈코프는 이성을 믿고 절대적인 숭배를 거부하는 이반의 뜻을 따르면서 오히려 그를 절대적으로 추종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반의 말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이반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라고 굳게 믿는다.

 

살면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라도 믿어야 험난한 생의 여정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스메르쟈코프에겐 그 자신을 믿을 여지가 거의 없다. 그는 사회적으로 누구와도 교류를 맺지 않고, 가족 공동체마저 그를 외면했다. 이런 그가 ‘절대적인 믿음은 무의미하다’라는 뜻을 같이하는 이반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해 이반이 곧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믿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말미에서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그러한 태도에 당황한다. 당연하게도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절대자가 아니고, 그저 같은 아버지를 공유한 남남일 뿐이다. <스메르쟈코프>는 이 사실을 깨달은 스메르쟈코프의 혼란이 그려지는데, 여전히 불안한 그의 내면을 대변하듯 발작은 멈추지 않는다. 믿음을 부정하는 이반을 믿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스메르쟈코프의 노력은 사랑에 헌신한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수증기가 되어 허무하게 흩날린다.

 

 

 

아쉬운 점


 

나는 항상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뒤엎는 이야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가장 절대적인 진리, 신의 존재를 아버지에 빗대 의심하는 이 이야기는 완벽하게 나의 관심사와 부합한다. 그래서 이 극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몇몇 아쉬운 점을 들자면 <스메르쟈코프>가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스핀오프 작품이긴 하지만, 원작을 안 본 사람에겐 너무나 불친절하다는 점이다. 필자는 다행히 관람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이해하면서 봤지만 그렇게 배경지식으로 이해할 때마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보지 않은 사람은 온전히 즐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아쉬운 점은 ‘어머니’의 존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스메르쟈코프>와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모두 여성 캐릭터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와 아들들 얘기이고, 어머니는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스메르쟈코프>에서 두 번째 스메르쟈코프가 성모 마리아상에 기대 ‘엄마’라며 처절하게 노래하는데, 장면 그 자체로는 너무나 아름답고 절박하지만, 두 이야기를 모두 지켜본 나에겐 어딘가 불편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어머니의 역할은 철저히 배제되었는데 왜 정체성을 찾을 때만 엄마를 부른단 말인가. 지극히 남성 위주로만 이뤄진 이 가족 공동체에서도 오랫동안 여성을 억압해왔던 모성 신화가 작용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했다.

 

 

 

끝으로


 

<스메르쟈코프>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세 명으로 분열된 스메르쟈코프가 함께 절규하는 부분이었다. 이 극을 생각할 때면 항상 그 절규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저 강렬해서 그랬겠거니 넘겨왔는데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절규하는 순간에도 정체성을 알아내야만 했던 그의 의지. 그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건 바로 그 의지였다.

 

뮤지컬을 보면서 떠올린 질문, 나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 증명해 주는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어쩌면 스메르쟈코프처럼 평생 그 답을 찾을 때까지 깨닫기 위해 절규하는 것이 나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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