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범죄자에게 서사는 필요하지 않다 - 나를 지워줘 [도서]

미성년자이던 나는 이미 오래전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다.
글 입력 2022.04.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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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세상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른바 ‘n번방 사건’이었다.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속 n번방과 박사방에는 일반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 착취 영상이 대대적으로 공유 및 판매되고 있었다. 사건은 다수의 미성년자 피해자를 포함하고 있어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공유되고 있는 불법 촬영물들의 가혹함과 그 채팅방에 입장한 사용자 수가 최대 26만 명이라는 사실에 나도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악랄한 가해자들은 미성년자를 비롯한 일반 여성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여 그들이 성 착취 영상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협박했다. 이들은 해킹 링크를 통해 개인정보를 알아내고, 피해 여성들을 협박하며 지속해서 성 착취를 일삼았다. 피해자 중에는 미성년자들이 있었다. 성인이 되지 않아 미숙한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나, 그 불법 촬영물을 소비한 이들은 전부 일반인의 모습을 하고 우리 사이에 숨은 채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것에 일조했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다시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분강개할 사건이었으나, 모든 운영자 및 이용자 검거 및 합당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고 몇 년 후, ‘#위왓치유’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체코에서 제작된 이 영화 속에는 미성년자들을 상대로 성 착취와 그루밍, 가스라이팅, 협박을 시도하려는 범죄자들이 가득했다. 이게 현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런 끔찍한 일들은 아직도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이담 작가의 장편 소설 [나를 지워줘]는 이런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도와줘. 피해자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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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장의사는 인터넷의 기록을 지워주는 사람이다. 열일곱 살 모리는 디지털 장의사로 일하며 홈페이지를 운영 중이었다. 불법 촬영물로 고통 받는 피해자를 돕기 위함이었다. 잊혀질 권리. 모리는 의뢰인들의 잊혀질 권리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발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디지털 장의 홈페이지를 폐쇄하게 된다. 디지털 장의를 그만두게 된 모리를 찾아온 건 같은 학년 학생이자 학교의 스타인 리온이었다. 리온은 모리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에 대한 루머를 지워 달라고 부탁했다. 리온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리온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모함을 홀로 감내하고 있었다. 모리는 리온을 도우려 애쓰지만 막연하기만 했다. 리온과 모리를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은 없었다.


리온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건과 어딘가 비슷해 보인다. 피해자가 해킹을 당해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부터, 하나의 영상이 기하급수적인 수의 사람들에게 유포되고 그를 공유하는 거대한 카르텔이 존재하는 것까지 말이다. 그 속에서 모리는 리온을 돕기 위해 리온의 편에 선다.


[나를 지워줘]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리온의 친구, 민재이다. 재이는 입체적인 인물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지이기도 한 등장인물이다. 재이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피해자뿐이라고 말하며 모리는 재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재이가 도움을 요청할 때 모리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재이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피해자일 수 있고,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 그 어딘가에서 우리는 분명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으며, 언젠가 우리는 어떤 일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가해자를 방관해서는 안 되고, 피해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담 작가는 작품 속 범죄자에게 그 어떤 서사도 부여하지 않았다. 범죄자의 사연을 듣고 주인공 모리가 내뱉은 말은 ‘뭘 잘했다고 사람들이 동정하게 해?’였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 어떤 사연이라도 잘못의 대가를 대신 치러줄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은 가끔 잊어버리곤 한다. 죄는 오롯이 그 무게를 다해야 한다. 범죄자에게 서사는 필요하지 않다.


모리의 뚜렷한 가치관과 작품의 주제 의식은 작품의 소재가 떠안기는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불충분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형벌의 무게의 결말은 어딘가 찝찝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찝찝한 결말마저 현실의 것보다 이상적인 결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씁쓸함은 짙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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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들은 어리다. 그들은 성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미숙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성년자들을 보호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어리다는 이유로, 잘 모른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이용당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슬프게도 어떤 미성년자들은 가해자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들을 가해자로 만든 건 누구인가? 그것 역시 어른들이다.


리온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모리는 형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리온이과 모리가 느껴야 했던 무력감. 우리는 그걸 변명으로 많은 것을 묵과하고 있다. [나를 지워줘]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안겼다.


비단 미성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잊힐 권리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불법 촬영물로부터 잊혀져야 한다는 것 자체에 폐단이 있다.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 불법 촬영물이지 않은가. 그러나 일반인 불법 촬영물이 암암리에 판매되고, SNS에서는 미성년자를 유혹하는 성 착취 함정이 존재하며, 성매매 업소의 수가 카페의 수보다 많은 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이 현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불법 촬영물을 ‘몰래카메라’라고 부르던 여론은 변했다. 이제는 우리가 변해야 할 차례다. 언제까지고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에 대해서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다. 언제까지고 무지를 앞세워 뒤늦은 후회만 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가해자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꼴에 기만당할 수 없다.


도와줘. 도와주세요. 도움을 청하는 말은 생각보다 입 밖으로 내기 힘들다. 그렇기에 우리가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은 정말 급박한 상황이 닥쳤다는 의미다. 용기를 짜내 힘들게 건넨 그 말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용기를 내야 한다.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약자들에게 언제나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잊히고 싶어 한다면 기꺼이 눈을 감아줄 수 있어야 한다. 잊혀질 권리. 그것은 사실 우리가 잊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그것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미성년자이던 나는 이미 오래전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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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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