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아하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울고 싶어져요." [만화]

카와치 하루카, <세키네씨의 사랑>
글 입력 2022.04.1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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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우리는 어떻게 굴까?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면 크게 티가 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얼굴이 붉어지거나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긴장해서 갑자기 수다스러워지거나, 오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론들에 의하면 상대방 쪽으로 몸을 기울이거나, 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기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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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꾸만 눈물을 흘리게 되는 남자가 있다. 서른 살 세키네 케이치로다. 친구인 콘노의 말처럼 열받을 정도로 뭐든 잘하는 그는 스포츠 만능에 학창 시절 성적은 우수,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다가올 만한 사람이다. 대기업에 입사해 그다지 아등바등하지 않고도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사교성 없이 무뚝뚝한 성격마저도 잘난 외모와 큰 키, 몸에 밴 세련된 배려 앞에서 차도남이라는 매력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창작물 속 인물은 독자나 다른 등장인물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도 완벽할 수 없는 법. 누구보다 세상 살기가 쉽고 만만해 보이는 그에게도 '인간으로서 뭔가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과 다른 사람들, 자기 자신에게도 별 관심이 없다는 것. 세키네 씨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버릇이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첫사랑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주장으로 반장으로 회장으로 연인으로 임명되는 그대로 수행했을 뿐'이라는 그에게 좋고 싫음이란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타인이 부탁하는 일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며 그저 수동적으로 휩쓸리기만 한다. 이는 단지 업무적인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 다가오면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는 그는 기간 한정 애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여학생들에게 20분이라는 시간을 대뜸 주기도 한다.

작가의 표현처럼 세키네 씨는 '죄 많은 무지함'과 '서글픈 완벽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이렇게 자각 없는 이케맨(イケメン)이라니, 처음에는 짜증을 유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하나에 열중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결국 무엇이든 적당히 잘 해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공부도 운동도 연애도 그럴듯하게 해내온 주제에 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지.

하지만 '인간으로서 뭔가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져 있는 느낌'이 세키네를 마냥 짜증 나지 않는 인물로 만든다. 보통 만화 속 캐릭터들은 자기만의 욕구나 목표로 움직이기 마련이건만, 이 사람에게는 도통 그런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가 대체 무엇을 동력으로 삼아 살아올 수 있었는지 쉽게 짐작 가지 않았다.
 
세키네는 미팅 자리에서 어떤 취미가 있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텅 비어있는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뜨개질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털실과 바늘을 사러 간 가게에서 수예점 손녀 키사라기 사라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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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땋은 머리카락, 하와이안 패턴이 그려진 가방, 차이나 카라의 재킷, 9부 바지, 크고 둥근 눈, 주근깨까지. 겉모습만 보고도 어떤 사람인지 지레짐작하게 되는 사라는 상냥하면서도 똑 부러지고, 씩씩하면서도 명랑한 사람이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사는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세키네와 달리 사라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무척 솔직하다.

그런 사라는 툭하면 자기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갑자기 도망치는 등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세키네를 가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를 걱정하고, 응원을 보내며, 때로는 충고도 서슴지 않는다. 세키네가 오랜 세월 깨닫지 못했던 첫사랑을 작가가 한 것도 사라가 건넨 '계속 좋아했잖아요? 선배인 카즈네 씨를. 그게 세키네 씨의 사랑이잖아요.'라는 말 덕분이다. 사라가 하는 말들은 세키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시간 때우기라고 여겼던 모든 것에 애착을 갖게 만든다.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매개는 역시 뜨개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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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독백하는 세키네에게 뜨개질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을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각하지 못한 채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신의 이름을, 기억을 직조해버리곤 한다. 인생은 '그냥 되는 대로 살다 보니 이렇게 엉켜버'렸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탓에 털실만큼은 꼬이게 두지 못하고 무언가를 만들 수밖에 없다.

물 흐르는 대로 살며 진심을 회피해 온 세키네에게 있어 뜨개질은 가라앉아있던 앙금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매개인 셈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울고 싶어"진다고 답했던 그는 사라와 수예를 통해 자기 속마음을 마주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이 만화의 큰 갈래는 순정이지만, 답답할 정도로 유감스럽던 세키네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일종의 성장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이든 잘하는 세키네 씨답게 수예점에 가면 갈수록 그의 뜨개질 실력을 일취월장한다. 동시에 무채색인 자기 인생에 예기치 못한 활력을 불러 넣는 사라를 향한 이름 모를 감정도 점점 커져간다. 켜켜이 쌓인 감정은 색색의 실이 되어, 어느덧 세키네 앞에 지구 몇 바퀴를 감고도 남을 분량의 실타래가 된다. 이제 세키네는 마음이 시키고, 손이 가는 대로 하나의 형태를 짤 수밖에 없다.

<세키네 씨의 사랑>은 대놓고 잘난 남자와 언뜻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만난다는 순정만화 클리셰를 따르고 있지만, 세키네 씨의 유감스러운 면모로 자꾸만 꼬이게 된다. 서로의 진심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건 어느 순정만화나 마찬가지겠지만, 세심한 심리 묘사와 감정선을 끌어가는 데 탁월한 작가의 연출 능력을 통해 세키네 씨의 사랑에는 설득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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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이 만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학창 시절 콘노는 거식증에 걸린 카즈네 선배를 위해 매일 캐릭터 도시락을 싸온다. 마찬가지로 카즈네 선배를 좋아했던 세키네는 그때를 회상하며 '그 시절의 나는 그 시절의 콘노에게 절대 이길 수 없었다'라고 독백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줄곧 자기 감정을 착각해왔던 세키네와 달리 사랑은 결코 헷갈리지도,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 것이라 말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만화로 작가 카와치 하루카의 팬이 되었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언제나 연약하고, 위태로우며, 컬러풀하지만, 음습한 구석이 있고, 다소 찌질하기까지 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울어버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 우는 모습을 보면 손을 뻗어 휴지를 건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신이 어디서 연약해지는지 보여준 사람을 모른 척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가 만든 '아픈 인물'들은 이런 방식으로 나와 닮은 구석이 없는 사람에게 심정적으로 공감하게 만든다.
 
내게 <세키네 씨의 사랑>은 누군가의 사랑을 들여다보는 일이 이래서 좋고, 괴롭고, 슬픈 동시에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만화다. 카와치 하루카의 적당히 불쾌하고, 찝찝하면서도, 발랄한 상상력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인물 설정으로 보나, 이야기로 보나 흔히 생각하는 순정만화처럼 밝고 경쾌한 작품은 아니지만 볕이 잘 들지 않는 습지처럼 눅눅하고 축축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어 하리라 확신한다. 뜨개질이라는 분명한 메타포를 이용해 다양한 은유를 덧대며 한가지 감정을 촘촘하게 짜보이는 작가의 훌륭한 수예 솜씨는 물론이고 말이다.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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