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 나를 지워줘 [도서]

글 입력 2022.04.1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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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쌍둥이 동생 모연은 실종 당했다. 모연을 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던 열일곱 살의 모리는 불법 촬영물 유포 사이트에서 모연과 비슷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고, 그때부터 디지털 장의사(불법 촬영물을 지워주는 일)에 눈을 떴다. 디지털 장의사로 인터넷에 퍼진 기록을 모으는 와중에 경찰에 연루된 모리는 사이트의 문을 닫는다. 하필 그때 같은 반 친구이자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 톱10에 오른 학교의 스타, 리온이 부탁을 해온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에 관한 소문과 딥페이크 영상을 지워달라는 것이다. 모리는 고민 끝에 리온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더 큰 사건이 벌어진다. 8반 남학생 단톡방이 열리면서 실제 리온의 모습이 담긴 불법 촬영물이 유포되기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리온은 자살 기도를 하고, 모리는 나서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해자를 쫓는 위험한 추적에 나선다.

 


열일곱 살 모리는 디지털 장의사이자 리온을 돕기 위해 애쓴다. 현준은 지독한 악플러였고, 모리에게 자신의 댓글을 지워주길 의뢰하기도 한다. 리온은 학교의 스타이고, 재이는 리온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진욱의 협박과 질투로 리온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 수성은 모리의 친구이자 단톡방 게시물을 본 이, 진욱은 상습적 성 착취 물 유포자였다.


소설 <나를 지워줘>는 가해자를 특정하는 듯하다가, 흐름이 점점 얽히고설키면서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잣대 위로 올린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묻는다. 피해자라고 하는 순간 가해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아니다. 다만, 각 인물이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요인은 항상 존재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가해자들 나름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손가락질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불분명해졌다.


가정환경, 친구들과의 관계, 각 개인의 성향,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수천 개의 감정,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내 시선, 수만 개의 생각이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뿐 아니라 우리가 겪는 세상의 이야기에서 단 한 번이라도 가해자가 아니었던 적은 있었는지, 그 경계는 어디부터인지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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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좀비였다. 좀비 하나를 죽여도 새로운 좀비는 그보다 빨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원본 사진은 물론 딥페이크로 조작한 사진과 영상도 처음에는 몇 명만 내려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곳에 그것들을 게시하면 몇 배로 늘어난 사람들이 내려받게 되는 것이다. 재이는 인터넷에서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지워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아득함에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157p)


 

리온의 영상이 올라간 후, 리온과 ‘친한 친구’라는 말을 줄곧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남의 일처럼 넘어간 재이도, 진욱의 농간에 사진 유포의 피해자가 된다. 끝없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독자로서 어느 행동에 더 힘을 실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인과응보로 귀결되는 고전동화의 결말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재이에게 일어난 일들에 속이 시원해진다거나 하지 않고 답답했다.


재이는 누구나 자기 몸을 봐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었다. 잘못이라면 진욱의 말을 믿은 것뿐이었다. 만약 자기를 찍는 걸 허락했다 쳐도, 그걸 마음대로 유포할 권리는 없었(162p)으니까.

 

 

수석이 말을 더듬으며 모리를 제지했다. 하지만 모리는 멈출 수 없었다. 진욱에게 사연이 있다고 해서 잘못이 저절로 용서되지는 않았다.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리온이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순간을 되돌리지 못한다. (175p)

 

 

소설은 수성의 입을 빌려 진욱의 행동에 대한 요인을 한 줄 언급한다.

 

가정사와 학업 스트레스. 시각에 따라 변명처럼 들릴 수 있고 설득이 되는 말처럼도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생각하던 찰나, 모리는 “난 그게 싫어. 학업 스트레스받는다고 전부 정진욱처럼 하는 거 아니잖아. 뭘 잘한 일이라고 사람들이 동정하게 해?”라 일축한다.


가끔 범죄 수사나 분석을 보면 사람들의 행동 양상이나 요인을 ‘분석과 분류의 방법’으로써 언급한다. 설득의 용도가 아닌 설명의 용도로만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이 무색하게, 이따금 중대한 사건임에도 감형이나 집행유예가 되었다는 몇몇 사회 이슈에는 변명이 해명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생각하게 하곤 한다. 진욱도 다른 사건과 맞물려 여타의 다른 이유와 함께 그를 해명으로 사용했는지 후에 미성년자로 집행유예를 받았고, 재이는 자퇴를 하게 된다.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던 진욱은, 재이가 이젠 본인의 영상을 미톡에 올리자 자신이 한 짓은 잊고, 되려 “아무리 봐도 넌 피해자답지 않아. 피해자라면 고개도 좀 숙이고, 울고불고해야지!”라며 소리친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2차 가해와 함께, (반대로) 영상 유포의 피해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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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뒤통수에 대고 김 형사는 말했다.

 

"혹여나 네가 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쉽지 않을뿐더러, 그 소굴에 잘못 들어가면 너도 똑같은 인간 되는 거야. 네가 아무리 정의로운 목적으로 행동했다 해도 성착취물을 소비한 건 사실이 되거든." 문득 김 형사는 모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 이미 예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0p)

 


싸우는 걸 싫어해 한 발자국 물러나 있던 과거 어느 때의 기억은, 소설 속의 단톡방에서 말없이 숫자만 내려가게 한 누군가나 채팅방을 나가버린 누군가의 모습과 겹친다. 아무 곳에도 끼고 싶지 않았지만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말마따나 ‘방관자’라 칭해진다.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을 제외한, ‘알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은 사람’, ‘사건의 발생은 알지만, 마음을 두지는 않은 사람’의 입지는 묘하게 좁아진다.


편이 되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인 한편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도와주려다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리온과 디지털 장의사로서 첫 의뢰자인 이를 위한 모리의 태도는 정말 용감한 일임은 분명하다. 혹여나 편이 되고 싶지 않아 방관이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면, 과연 그 안에서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까.


소설 <나를 지워줘>는 디지털 범죄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개인사부터 형사의 말, 사회의 결론까지 담아내 생각할 고민거리를 주는 책이었다. 사회는 여러 이슈가 즐비하다. 벌어지는 일들을 부정하기보다 맞닥뜨려 가감 없이 담아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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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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