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녀에게 난처한 일이 생겼다 [문학]

글 입력 2022.04.04 14: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런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 수가. 그녀는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리와 팔을 쓸어내리면 고운 눈가루가 떨어져 흩날리는 눈사람이. 한강 작가의 단편 소설 「작별」은 비록 눈‘사람’이라 이름 붙여졌지만 결코 사람은 아닌 눈사람의 속성에 주목해 사람과 사물 사이, 그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131.jpg


 

 

이상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눈사람이 되어버린 사건은 분명 이상하고도 난처한 일이다. 누군가 ‘왜 그녀는 눈사람으로 변했나’를 묻는다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만 비틀어 ‘왜 하필 눈사람이었을까’를 묻는다면,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인공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테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하던 인물이었다. 회사에서 사직 권고를 받은 뒤, 모른 체 출근하며 일을 하다 잠시 쉴 때면 꼼짝 없이 사물처럼 앉아 플라타너스의 잎사귀들을 바라보았고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자신이 지하철의 손잡이, 사람들 어깨에 매달려 있는 낡은 가방, 그리고 그 안에 소리 없이 담겨있는 지갑이나 필통 같은 거라고 상상했다. 살아 있는 자신과 남동생 대신 죽은 오빠만을 그리워하는 부모 앞에서 마저 그녀는 스스로를 맥동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떠한 사물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그렇게 사람과 사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에 애매하게 걸친 덕분인지 그녀는 관계 맺음에 있어서도 조심스럽다. 그녀는 항상 언제가 자신의 끝인가를 생각하며 늘 최악의 가능성에 대비해 장단기 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절약해 미래 아이의 대학 자금을 위해 예산을 짜고 결산하던 인물이다. 반면 지금 만나고 있는 7살 어린 현수씨는 계약직으로 채용된 뒤 계약이 갱신되지 않거나, 비인간적 대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을 반복해오고 있는 인물이다. 연인임에도 그녀는 현수에게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장기적으로’ 묻지 못한다.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녹는다는 건



그러한 그녀가 자신이 분명한 사람임을 느끼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눈사람이 된 이후부터다. 그녀는 눈사람이 되어서야 잊고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겨우 스물넷에 낳은 아들 윤이를 안고 나란히 누워 맞았던 오래전 여름의 새벽, 그 아이가 절대적인 믿음을 담아 웃음을 지어주던 때, 그리고 오빠와 그녀, 그리고 남동생이 목마 하나를 셋이서 타던 때….


그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감정을 느끼는 순간마다 그녀는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심장 주변부터 녹아 옆구리에 고인 더운물은, 눈사람처럼 모든 것에 무던하고 스스로를 사물이라 생각했던 그녀가 실은 뜨거운 체액과 박동하는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는 명징한 사인이자 흔적이다.

 

또한 냉동실에 넣어둔 눈사람의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건 “낙하하는 눈송이들을 날개처럼 가볍게 만들어주는 공기의 입자들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라는데, 묵힌 기억들을 꺼내는 순간 녹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의 몸을 받치고 지지하던 공기 입자들은 바로 그녀의 기억들일 테다.


작중 그녀는 ‘무서울 게 뭐야,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면 어때’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를 ‘고통이 없다면 두려울 것도 없을 것’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내게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녀는 평생을 어디에 속하지 못하고 경계 위에서 살아왔기에, 눈사람이 된 이후에야 처음으로 명징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녹는다는 건, 그녀에게 살아있음이다.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린다는 건 더 빠르게 녹는다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잠시라도 제대로 생각을 하고 싶다.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기억들을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두려울 게 없다.

 

*

 

그녀는 결국 모두 녹아 없어질 것이다. 작가가 상정한 천변 –경계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이라는 공간, 곧 풀릴 것 같은 따뜻한 겨울 날씨, 그리고 평소보다 더 든든하게 옷을 입고 나온 상황 모두가 그녀가 녹을 수밖에 없다고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을 거다. 언젠가 대학 동창의 갑작스런 부고를 들은 뒤부터,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는 그녀의 마지막과 그녀가 없을 수도 있을 상황을 늘 준비해왔으니까. 그리고 눈사람이 된 지금도 필사적으로 그것을 해내고 있으니까. 비록 그녀는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미온한 태도로 경계를 살아왔지만 아들에게만은 언제나 어둠보다 빛을 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사력을 다해 그녀는 가까스로 뒤를 돌아본다.

 

 

 

박민경.jpg

 

 

[박민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