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카페의 '더 테이블', 그리고 대화 엿듣기 [영화]

당신의 옆 테이블에서는 어떤 대화를 하고 있나요
글 입력 2022.04.02 16: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카페에 앉아있기 가장 좋은 시간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늦은 오후일 것이다. 절반 정도는 비어있는 테이블과 귀를 기울이면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당한 소음. 따뜻하게 잔잔한 순간이다. 혼자 앉아 과제를 하거나 무언가를 적다 한 번씩 어깨를 펼 겸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간혹 시선의 끝자락에 대화에 파묻힌 이들이 보이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화 ‘더 테이블’은 그런 카페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우리 앞에 옆 테이블에서 펼쳐지는 대화들을 펼쳐놓는다.


영화 ‘더 테이블’에는 네 번의 대화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그저 대화하는 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얼핏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생각나는 구성이지만, ‘더 테이블’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보다 따스하다. 잔잔하게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많아 기분이 좋아지고 싶은 날에 꺼내 보고 싶어진다. 날씨마저 겨울 티를 완전히 벗어가는 요즘이다. ‘더 테이블’ 속 이들의 대화를 듣기 좋은 때라는 뜻이다.

 

 

 

#1 11:00 a.m.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포맷변환][크기변환]movie_image-48.jpg

 

 

우리가 엿들을 첫 번째 대화는 인기 있는 여배우가 된 유진과 그녀의 구남친 창석의 대화이다. 시간이 나쁜 이유는 강력했던 기억들만 남긴 채 모두 씻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흐려진 기억 속의 그대를 다시 마주하고 싶어 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흐려진 기간의 공백 사이에는 시간이 있고,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는 그대로인데 그를 보는 나의 시선만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는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진은 흐린 기억 속 창석을 다시 마주한다. 내가 기억하던 그의 다정함을 떠올리는 순간도 잠시, 창석은 유진을 자신의 전 여자친구라기보다는 연예인으로만 바라보며 무례한 질문들을 던진다. 연예계 찌라시부터 코 성형 질문까지 묵묵히 듣던 유진은 문득 연애할 때 느꼈던 창석의 눈치 없음을 다시 떠올린다.

 

사람들이 자신이 유진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며 인증 사진까지 찍어달라 요구하는 창석에게 유진은 완전히 질려버린 표정을 짓고, 심지어 카페 밖에서 둘을 힐끔거리는 창석의 직장동료들까지 목격해 버린다. 유진은 봄에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챙겨봐달라는 연예인으로서의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난다.


나를 스쳐 간 사람들은 흐려진다. 우리는 어쩌면 잔상들을 기억하며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 잔상을 다시 선명하게 만들어 볼지, 흐린 기억 속에 남겨둘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호기심과 연민에 담아둔 상자를 다시 열어보는 건 행운이 될 수도, 큰 실수가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왜 그들을 스쳐 보내야만 했는지 다시 자각할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수확은 있다. 내가 한때 저런 사람을 좋아했다니, 기분 나쁘면서도 후련하게 치워버릴 수 있지 않는가.


 


# 02:30 p.m. 떨림: 체코에서 태엽을 감아 당신에게


 

[포맷변환][크기변환]220CE64D57D6160E0E.jpg

 

 

이번에는 민호와 경진이 카페로 들어와 앉는다. 슬쩍 보니 친구 사이인 텐션은 아니다. 묘하게 불편한데 서로를 의식하는 듯 보인다. 둘 사이의 자세한 사연은 알지 못한다. 대충 원나잇 스탠드와 비슷한, 그리 깊지는 않은 인연이었던 듯싶은데 민호는 긴 여행을 앞두고 있었고, 경진은 이를 알고 있었다. 민호는 인도와 체코, 파리 등을 여행한 후 돌아왔고, 경진은 그를 기다렸다. 여행에서 돌아온 민호는 카페에서 경진을 만났다. 여기까지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경진과 민호 사이의 이야기이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지만, 둘은 여행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 얘기를 나눈다. 민호는 좀 재수가 없다. 여행 가서 좋은 걸 보면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낼 줄 알았다는 경진의 말에 민호는 그래도 되는지 몰랐다며, 급기야 둘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지 않냐는 망언을 던져 화난 경진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다. 둘을 둘러싼 기류가 바뀌는 건 이 시점부터다.


민호는 경진의 팔을 붙잡고 이걸 주기 위해 만나자고 했다며, 경진의 팔에 체코에서 사 온 시계를 채워준다. 태엽을 매일 감아줘야 움직이는데, 경진에게 주고 싶어 매일 감았다면서. 고개 숙이며 웃는 경진을 보고 민호는 허락이라도 받았다는 듯 여행을 다녀온 각국에서 경진을 생각하며 사 온 선물들을 가방에서 줄줄이 늘어놓는다. 거울과 카메라, 못난 인형이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대변하듯 민호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다.


음식 잡지를 만드는 회사로 얼마 전 이직한 경진에게, 대출을 받아 사업이나 해야겠다고 농담을 던지던 민호는 경진에게 자신의 집에 가서 자신이 만든 파스타에 대한 후기를 써달라고 말한다. 서로를 알아가보기로 결심한 둘은 그렇게 함께 카페를 나선다. 경진의 손목에는 체코로부터 온 시계가 채워진 채로.


가끔 사랑은 사람을 귀엽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아무리 스스로 성숙해지고 현실적이 되어간다 생각해도, 속절없이 속을 다 드러내놓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현실에 찌들어 간다 해도 그런 귀여운 순간들을 연출하는 사람이 있어서, 또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에 삶에 기대를 버리지 않을 수 있다.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생각하며 매일 감는 태엽은 얼마나 로맨틱한가. 한국과 밤낮이 정반대인 곳에서, 돌아가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고 싶다는 그 순수한 호기심과 떨림에 설쳤을 밤들이 부럽다. 서투르게 에둘러 말하다가 결국 선물과 함께 마음을 늘어놓는 남자와 서운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풀려버린 걸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자의 대화는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아마 더 테이블에서 내가 가장 많이 돌려본 에피소드는 두 번째 에피소드일 것이다.


 


# 5:00 p.m. 진심 혹은 거짓


 

[포맷변환][크기변환]image_9022288901634720222436.jpg

 

 

젊은 여성 은희와 엄마뻘로 보이는 숙자. 모녀 관계라고 추측해보지만, 틀렸다. 은희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은희는 숙자를 결혼식에 올 가짜 엄마로 섭외했고, 숙자는 결혼식에서 숙자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한다. 남자 쪽 식구들의 정보와 입을 맞춰야 할 것들을 자세히 적던 숙자와 은희는 서로의 사연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스포프용품점의 사장을 작업하려고 집안에 대해 거짓말을 하다가 정작 용품점의 돈 없는 막내 사원과 마음이 통해 결혼하게 된 은희는 사실대로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남의 결혼식에 가짜 엄마 역할을 해주며 돈을 버는 숙자는 딸의 진짜 결혼식에 입고 가기 위해 옷까지 준비해 놓았지만, 딸은 숙자가 자신의 결혼식에 오기를 바라지 않아 결국 입고 가지 못했으며 몇 년 전에 사망했다. 각자의 사연이 있는 이들은 거짓말로 만나 진심 어린 사연을 나누게 된다.


숙자와 은희는 서로의 결핍을 채워준다. 별것 아닐지 모르는 이 결혼식의 작은 거짓을 계기로, 둘은 서로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위로받는다. 사실 나는 숙자와 은희의 이야기를 통해 엄청난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라 느껴질 지 몰라도, 두 인물이 서로에게 위로라는 경험을 선사했다는 사실이 좋았다.


아동발달이론에서, 학자가 누구였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성장에 있어 전 단계에서의 발달 과업을 완료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으면 그 결핍은 평생동안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있다.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삶에서 상처와 아픔은 필연적이라고 하지만, 그 상처가 제대로 보듬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흉터를 달고 살아가지 않는가. 그 상처를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연고를 발라주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은희와 숙자처럼 말이다.

 

 


# 9:00 p.m. 사랑은 타이밍, 타이밍, 용기


 

[포맷변환][크기변환]2646B233597AA4BC26.jpg

 

 

카페 문을 닫아야 할 무렵이다. 마지막으로 엿볼 대화는 운철과 혜경의 대화이다. 혜경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기에는 혜경과 운철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묘하다. 혜경은 운철의 걱정을 걱정하고, 운철이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지겠다고 한다. 혜경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운철의 말에 혜경은 막무가내로 자신과 바람을 피우자고 한다. 운철은 이게 자신의 선택이라며 거절한다.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다르다는 혜경에게 윤철은 그게 곧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혜경은 자신은 아무런 선택을 한 적 없고 그냥 내몰렸을 뿐이라 대답한다. 비 그친 밤, 카페 밖으로 나간 뒤 운철은 혜경에게 아직은 너와 같이 자고 싶다고 말한다. 혜경은 안다고 대답한다. 운철은 꿈속에서 혜경과 많이 걸었다고 말한다. 혜경은 다시는 운철에게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운철은 잘 생각했다고 답한다. 그렇게 운철과 혜경은 서로의 길을 간다.


운철과 혜경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는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있다. 감정은 이상하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말하고 싶어도 담아둬야만 하는 것들이 생긴다. 우리는 때로 솔직하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숨어버리기도 한다. 말해야 할 시기를 지나쳐버린 감정들이 있다. 표출될 기회를 잃어버린 감정들은 속을 그렇게 맴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을 때 우리는 비로소 후회한다.


그래서 사랑은, 관계는, 타이밍이고 용기이다. 그 시절의 나는 말할 수 없었지만,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사람의 삶이란 건 마음만으로 그 방향을 틀기 쉽지 않기에 우리는 알면서도 이미 지나온 길을 그대로 걸어간다.

 

그래서 삶은 미련의 연속이다. 미련을 털어내기 위해 망각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완성된 또는 미완성된 관계들은 우리 삶을 만든다. 지금의 우리를 만들 것들은 대부분 이미 우리 곁을 떠나버린 것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어쩌면 그냥 내몰리기로, 시간에 휩쓸리기로 결정한 것 역시 혜경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후회할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감내하는 것 역시 삶의 몫이니 말이다.


*

 

더 테이블 속 네 쌍의 대화를 들으며 나의 지난 관계들을 되돌아본다. 봄은 시작의 다른 말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떤 관계를 새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떠나보냈는가.

 

 

 

박소현.jpg

 

 

[박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84029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