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글 입력 2022.04.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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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이야기를 좋아한다.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을 겪어도 결국 마지막에는 이전보다 한 뼘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주인공이 언젠간 새로운 시련을 마주하더라도, 주인공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걸어갈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성장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울린다. 그 시작과 끝 사이에 인물에게 건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관객인 나에게까지 와닿는다면 더더욱.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주인공 로리가 아빠의 유골함을 가지고 북극으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로리가 북극으로 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빠의 꿈이 북극 탐험가였기 때문이고, 아빠의 유골함을 단순히 자신의 집 한편에 내버려 둘 수 없어서다. 로리는 아빠가 자주 말해 주던 북극과 탐험가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빠의 일기장을 발판 삼아 앞으로 성큼성큼 발을 뻗으며 북극으로 나아간다. 이야기는 로리가 북극으로 나아가는 여정이자 아빠의 죽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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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는 당찬 10대 여자아이다. 호기심도 많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제자리에 가만히 머무르는 것은 절대 상황을 진전시키지 않으니 직접 경험해야 깨달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마치 아빠가 떠나고 장례식까지 마치고 난 뒤에도 로리가 아빠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이가 이제는 나의 곁에 없다는 사실은 그 어떤 사실보다 잔인하기에 일단 무작정 회피를 하게 된다. 그러나 로리는 회피의 상태에서 가만히 머물지 않았다. 일단 발걸음을 내디뎌 아빠가 평생을 꿈에 그리던 북극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로리의 성장은 시작된다.


여행의 마지막에 이르러 로리는 엄마와 함께 아빠의 유골을 북극에 날려 떠나보낸다. 그것도 날 수 없다면 다다를 수 없는 천상의 북극으로. 유골이 절대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천상의 북극으로 가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장면은 로리의 성장이 축하받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제는 아빠를 정말 잘 떠나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그 순간, 북극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이룰 수 없었을 깨달음에 대한 축하다. 북극이, 그리고 아빠가 로리에게 보내는 따뜻한 축하.

 

이야기는 로리는 물론, 나아가 엄마의 성장까지도 세심하게 다룬다. 로리와 엄마는 아빠이자 남편의 죽음 이후 서로 마음속으로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 응어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두 사람에게 이 북극 여행이 없었더라면 서로 마음속에 이 응어리를 유지한 채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사이 어쩌면 먼지가 쌓이고 얼룩이 져, 서로 보듬어야 할 두 사람을 오히려 해칠 갈등 뭉치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리는 일단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은 엄마도 성장의 여정에 초대한다. 엄마 역시 기꺼이 거기에 응하여 남편의 상실에 대해 미처 태우지 못했던 감정을 마침내 연소시킨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지난 경험을 거름 삼아 서로에게 보다 의지할 것이다. 로리는 북극으로 여행을 떠날 때 그러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일단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엄마 역시 로리와 함께할 것이다. 때로는 뒤돌아 서로를 기다려주고, 잠깐씩 쉬어가며 서로를 보듬을 것이다. 이야기는 로리의 성장에서 시작하여 로리와 엄마라는 가족의 성장으로까지 의미를 확장하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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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성장이 나에게 유독 뭉클하게 다가왔던 것은 이 이야기가 연극으로, 그것도 1인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연극은 노래나 안무가 없기 때문에 살갗으로 극장 안의 모든 공기와 울림이 느껴진다. 게다가 그 연극이 1인극이라면 한 명의 목소리와 대사만이 나를 감싼다.

 

나는 1인극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로리가 해 주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갈 수 있었다. 로리 한 명의 목소리, 그리고 로리가 내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무대와 배우를 그저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말 북극에서 로리와 서로 소통하고 함께 있는 느낌을 받았다. 1인극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경험이다.


90분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가 끝난 후 극장을 나오면서, 정말 사랑하게 될 따뜻한 성장 이야기를 하나 만났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로리가 나에게 남기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뭘까? 무어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나 역시 앞으로 로리처럼 내가 마주할 모든 슬픔을 한 걸음 내디디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로리, 그리고 나의 성장까지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랑스럽고 한 편의 동화 같은 연극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장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 역시 성장하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보기 전보다는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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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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