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망하지 않았다

글 입력 2022.03.3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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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을 했다. 복잡할 것 까진 없어도 다소 번잡스러운 절차를 지나는 동안 숱한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서류를 제출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일시정지'를 누를 수 있는 기회가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멈췄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의 풍경을 둘러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더 그럴 싸 했다. 넘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 모든 걸 다 내 손으로 선택해 왔는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무엇인가에 떠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가 내 휴학에 대한 정성스러운 변명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것들이 무색하게도 막상 휴학 승인이 떨어지고 나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휴학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 정도가 전부였다. 휴학 생활의 신호탄이 떨어지고 나서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 날 적어 두었던 버킷 리스트와 학교를 쉬는 일년 간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함께 모아 새로이 정리했다. 수능이 끝나고서도 정시 입시를 준비하느라 사실상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주어진 완벽한 자유였다. 학생이지만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학생이라니. 이거 꽤 괜찮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강하고 나면 종강하기까지의 시간이 거북이 지나가듯 느릿하게만 흘렀던 것 같은데 왠걸, 학교에 가지 않으니 같은 시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지나갔다. 매일같이 연락하는 친구들은 엊그제 개강했다면서 벌써 중간고사를 치르고, 엊그제 중간고사가 끝났다면서 내일모레 종강이라고 했다. 그들이 지난 십여 년 간 그래왔던 것처럼 당연해 보이는 지루하고도 쏜살같은 일상에 몸을 맡기는 동안 나는 나대로 꼼질거리며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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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했다. 아빠는 내게 욕심부리지 말라 했지만 하고 싶으니 그냥 했다. 십 만원이 넘는 인터넷 강의를 결제하고 알파벳부터 새롭게 배워 나갔다. 자격증 공부도 했다. 남들 다 하길래 만만하게 봤던 컴퓨터활용능력 시험은 내 뒷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기고 날 약 올렸다. 어쨌거나 결국 따긴 땄다.

 

많은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나면 글을 썼다. 보고, 듣고, 읽는 것 없이 계속 고여 있는 물을 퍼내는 것만 같아 자주 들었던 자괴감이 점차 흐려져 가는 것을 느꼈다. 넷플릭스과 왓챠와 웨이브를 동시 결제하는 사치를 부리며 매일 같이 영화를 봤다. 결국은 앉아서 아이패드 화면만 쳐다보는 것에 질려 그만 두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 달은 넘게 영화에 빠져 지내봤다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베이킹을 시작하기도 하고, 난생 처음으로 스튜디오에 가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프로필 사진도 찍어보았다. 결국 업로드는 아직까지 하나도 못했지만 유튜브를 시작해볼 요량으로 유튜브 채널도 만들었다.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백만원이 넘는 카메라를 어느 날 덥석 결제하고는 후회도 해봤다. 요즘은 핸드폰 카메라로도 충분하다는 걸 잠시 욕망에 눈이 멀어 잊고 있었다. 어쨌든 원할 때 카메라 하나 들고 공원 산책을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자잘한 일들을 지속하거나, 새롭게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불안이 꿈틀거리며 종종 나를 자극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달리던 기차에서 잠시 하차하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곧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기차를 타고 예정된 길을 달리게 될 테니 말이다. 처음의 계획대로 거창한 일들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전략인 것 같았다. 사람과 상황에 치이던 내가 점차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일기를 썼다. 일찍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일기를 써야지. 몸과 마음을 쏟아내고 씻어내고. 맑은 정신으로 세상의 일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을 물어야지. 그리고 책을 펼쳐야지.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야지. 누구도 감히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는 나만의 하루를 시작해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적고 또 적었다.

 

마법처럼 괜찮아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의 삶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모르는 사이 상처받으면서, 등 떠밀리면서 강해지는 것에 꽤 많이 지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은 상처를 통해 성장한다고 믿지 않았던 나는, 정말로 나를 아프고 어지럽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한걸음 멀어지고 나서야 본래의 모습을 더욱 빠르게 회복해갔다. 육 개월이 지났으니 이대로 반 년만 더 주어진다면 딱 충분할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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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복학생이 되었다. 이 또한 내 선택이었으나 그야말로 태풍에 휘말린 듯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발단은 문자 한 통이었다.

 

어떤 문장은 온점이 채 찍히기도 전에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송곳 같은 텍스트가 운석처럼 뜨겁게 날아들었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위로 치솟기를 반복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그런데 '잘' 사는게 대체 뭐지? 지금 당장 뭘 해야 하는 거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떤 답이라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제자리를 뱅뱅 돌다가 그 길로 곧장 복학을 신청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던 것 마냥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맨 처음 휴학을 어떤 마음으로 결심했더라. 떠밀리고 있다고 느꼈던가. 사실 나는 내가 선택한 일임에도 '강제 하차' 당했다는 착각을 꽤 오랫동안 해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엔 일어날 일이었다고. 결국 나는 학교와 사람과 상처와 감당하고 싶지 않은 여러 상황으로부터 지쳐 나가떨어질 운명이었다고.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괜히 모른 척해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정말 쉽게 도피해버리는 나약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종종 알 수 없는 오한이 서릴 때마다 별 일 아니라며 무시했다. 이제 보니 그건 분기마다 찾아오는 불안이 아니라 나의 대책 없음을 질책하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덜컥 복학해버린 것은 말처럼 '덜컥'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결국 일어날 일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의 지난 궤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삶의 변수를 줄이면서 사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지으며 내 삶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평생 내 주변에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리고 누구도 나를 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게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내가 가지 못하는 곳, 하지 못하는 말, 만나지 못하는 인연이 생겨난다는 건 내게 또 다른 절망이었음을 이제는 시인한다.

 

지난 선택들, 그러니까 수많은 도망과 회피와 거절과 모른 체함이 하나하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손끝에 박히는 듯했다. 그래서 무엇을 쥐려 할 때 마다 살을 파고들어 나를 아프게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무조건 멈춘다고 해서 답이 보이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망쳐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 온종일 심장이 쿵쿵 울려 댔다. 다시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나서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철갑옷을 입고 비장하게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두렵고 피곤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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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고 요동이 잦아들 때쯤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 글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도 써봤다. 말로 해본 적은 없어도, 글로는 써봤다.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래로 정말 처음이었다. 진심이었다.

 

무서워서 손발을 덜덜 떨면서도 살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올해를 시작하며 아주 엉망인 한 해를 보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었다. 역시 쓰는 대로 흘러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역시 그래서 쓰지 않을 수 없지, 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지면을 빌려 이렇게 적고 싶다.

 

나는 망하지 않았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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