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무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무용한 걸 좋아하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줄 알았던 나
글 입력 2022.03.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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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개하는 글을 자발적으로 써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우리는 늘 단순히 소개하는 걸 넘어, 궁극적인 목표가 있는 자기소개서를 써버릇했으니까. 그래서 아트인사이트의 일원이 되고 처음 맞이했던 Project 당신은 지나쳤었다. 끊임없는 자기소개 과제에 지쳐있었던 탓에.


지금이라고 해서 그 기분이 달라진 건 아닌데, 번지르르한 꾸밈 말없이, 스펙을 나열하는 자기소개말고 ‘그냥 진짜 나’를 얘기하고 싶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26살(만으로 24살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 이채원에 대해.


 

 

무용한 것을 즐기는 도시 사람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픔과 투쟁을 담아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대사 중 하나다. 하룻밤 새에 집이 풍비박산 나도 모를 혼란의 시대에, 현실감각 없는 박애주의자나 할 수 있는 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데에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삶은 지탱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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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낮이고 밤이고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하늘이 말가면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진다. 물감 배합의 장인이 나타나도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하늘색을 감상하는 게 내 취미이자 힐링 타임이다.

 

밤하늘은 아주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달과 별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아, 과학서적이나 유튜브를 찾아가며 달과 별의 물질적 특성까지 파헤치는 사랑은 아니다. 그냥 이 조그만 지구라는 땅에 발을 딛고 바라보는 그것들의 존재가 좋다.

 

꽃은 물론이고, 공원, 바다, 녹음이 우거진 곳은 어디든 좋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은 집순이 쪽에 속하는 편임에도, 봄과 가을이 되면 가만히 앉아있질 못한다. 어디든 나가서 마음껏 자연을 즐기고 싶어한다.

 

반대로 복잡한 도시 속에서는 맥을 못 춘다. 수도권, 그것도 인구수 50만이 넘는 도시에서 살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사람이 많고 휘황찬란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에서 금방 지친다. 물론 나도 여느 또래들처럼 핫플레이스 동네, 전시회, 디저트 맛집 찾아가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다만 그 의지를 실천해낼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이 남들보다 꽤 모자랄 뿐.

 

그래서 서울 가는 건 아주 큰 맘 먹고 움직이는 일이라는 것. 지치지 않기 위해 A부터 Z까지 미리 계획을 짜고 움직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다.



 

덩치는 산만하지만 아기자기한 걸 사랑해


 

168과 169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학창시절 키순으로 줄을 설 때면 늘 끝자락에 있는 나는 내 키가 만족스러우면서도 때때로 작아지고 싶었다. 뼈대가 작으면 키까지 큰 늘씬한 모델 체형이 됐겠지만, 꽤 큰 축에 속한 뼈대 탓에 조금이라도 살이 붙으면 통통 해 보이는 게 스트레스였다. 보송보송한 어린 티를 벗어날 즈음에야 내가 가진 매력을 마음에 들어 하며 살았지만, 어린 시절 ‘작고 귀여운’ 것에 대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기자기한 것들을 참 좋아한다.

 

내 인생 첫 덕질은 캐릭터 리락쿠마였다. 게으른 곰들과 뽀짝뽀짝한 병아리가 쫑쫑쫑 걸어다니는 이미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문구점을 가면 언제나 리락쿠마 팬시  상품 하나는 손에 꼭 쥐고 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귀여운 것들에 대한 사랑’은 더 크고 비싼 값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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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무역갈등이 불거진 이후, 리락쿠마를 비롯한 헬로키티, 시나모롤 등 일본 캐릭터 상품 구매를 그만뒀지만, 때마침 국내 일러스트 작가들이 존재감을 대거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론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를 돌아다니며 스티커와 엽서를 쓸어 담으며 아기자기 컬렉션의 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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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캐릭터 상품을 좋아하다보면 문구류까지 관심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어린 날에는 교보문고 핫트랙스를 구경하다가 “엄마, 로또 걸리면 여기 있는 문구 다 사줘”라는 소박하면서도 당돌한 말을 했다더라.

 

그렇게 핫트랙스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하던 어린이는, 훗날 핫트랙스에 아르바이트까지 다니게 됐다. 문방구 사장의 꿈까진 이루지 못했지만, 굉장히 만족스러운 일터였다. 새 펜들과 노트, 메모지, 온갖 잡화들을 내 손으로 어루만지고 관리하는 데서 오는 충족감이란. 아마 덕심을 채워주는 직장으로는 이만한 데를 다시 못 찾을 거 같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


 

무용한 것과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한마디로 ‘잡덕’이 되어있었다. 특정한 한 가지만을 깊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에 관심을 두고 좋아하는 사람. 보통 꾸미기를 좋아하며 바깥에서 나가 노는 친구들은 게임이나 만화와 거리가 멀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나는 그들 모두와 취미를 나눌 수 있는 올라운더였다.

 

대중 영화, 드라마 챙겨보기, 컴퓨터 하나 장만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PC 방에서 써가며 게임하기, 만화 빌려 보기, 애니메이션 덕질하기, 연예인 덕질하기, 문학책 보기, 웹소설 보기, 혼자 끄적대는 글, 그림 쓰기, 사진 찍기, 인스타그래머블한 감성 플레이스 찾아다니기 등…

 

각 분야에서는 내 취향이 확고히 존재했지만, 분야 자체를 가리지 않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대학 입시를 대비하며 진로를 정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특정하게 하고 싶은 게 없다 보니 걱정스러웠다. 나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고 즐기는 게 가장 좋았던 ‘덕질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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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나에게 최적화된 학과를 찾아 들어가게 됐다. 바로 문화콘텐츠학과. 전통 매체와 디지털 미디어에 오르는 콘텐츠 전반을 다루는 학과였다. 영상, 그림, 글, 분야에 상관없이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획하고 홍보하는 전략을 배웠다. 거의 모든 과정이 팀 프로젝트로 이뤄졌기 때문에 학교생활이 바쁘고 힘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두루두루 공부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3학년쯤 되어서야 그 장점이 치명적인 단점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폭넓게 공부하는 만큼, 깊이를 채울 수 없었다. 다만 다른 동기들보다 내가 더 그랬다. 뭐 하나라도 더 관심을 두고 내가 깊이를 더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며 그저 한 학기 한 학기를 보냈던 게 후회가 됐다.

 

말하고 글 쓰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잘해낸다.

PPT도 어느 정도 잘 만든다.

포토샵도 일러스트레이터도 꽤 다룰 수 있다.

영상도 간단한 편집은 할 수 있다.

기획도 마케팅도 여러 번 수행한 적이 있다.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만 나를 한 문장으로 소개할 수 없었다. 다재다능해 보이지만, 무엇하나 전문성을 띄는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매일매일을 최선은 아니더라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안은 공허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포지션의 사람이라고 느끼게 됐다.

 

 

 

그래도 INF’J’는 계획을 해


 

그렇게 대학교 3, 4학년은 꽤 무기력한 상태를 지속했다. 이제 와서 한 분야에 전문성을 쌓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이라도 영상을 공부할까, 디자인을 공부하나’ 걱정하며 슬쩍슬쩍 공부를 하려 했다.

 

그러나 역시 영상과 디자인은 내게 있어 선망의 영역이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해온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게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조에 빠져있을 무렵, 내 주위의 친구들이 해준 말들이 컸다. 내 다양한 능력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내 스탯에 특장점은 없더라도, 총 누적 경험치가 크다는 걸 명심하라는 조언들이 나를 부정의 굴레에서 꺼내줬다.

 

당장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바뀐 생체리듬을 돌리려고 애쓰고,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 30분씩은 뉴스를 읽는 데에 할애했고, 책을 읽는 버릇도 들였다.

 

계획을 세운 게 성공하다 보니,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습관을 관리하는 어플을 이용해 매일매일을 규칙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플래너로는 하루 24시간을 10분 단위로 쪼개어 대강 내일의 일과를 적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계획을 사랑하는 J 중에서도 상 J였는지, 계획적인 삶은 내 하루를 보람차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나의 역량을 길러주고 있다. 상식, 지식, 교양의 영역. 벼락치기로 얻을 수 없는 탄탄한 내적 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여전히 나는 특출난 전문 분야는 없지만, 자신감은 꽤 붙었다. 나는 한 가지에 집중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더 빠르게, 혹은 새로운 형태의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을 매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기획의 알맹이가 되는 영감, 소재를 발굴하는 능력도 조금은 갖추고 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스탯을 찍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독특하고 매력적인 일꾼임을 알아 봐줄 거라는 믿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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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아니고 쓸데없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지만, 그게 나를 과소평가한 소개는 아니었다. 내가 ‘그냥 좋아했던’ 것들과 ‘내가’ 한 행동들로 보이는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 취업을 준비 중이라 스펙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하고 싶었다면서 해버렸지만… 아등바등 남들과 같은 나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음에 즐거운 글쓰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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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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