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끊임없이 장애물을 넘어 -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글 입력 2022.03.22 13:1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스포주의

 

 

xxl_poster_arko_370x520.jpg

 



베리어프리(barrier free) – 장애물을 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봤던 연극을 보면 무대 안과 밖으로 공간을 나눈다. 무대 안 공간만이 현실과 구분되는 이야기의 생산지이며 무대 밖은 이야기와 동떨어진 현실이다. 배우가 극중 무대를 벗어나면 시공간적으로 배제되며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아닌 현실 속 연기를 준비하는 실제 인물이 된다. 무대의 벽 뒤와 그 뒤로 통하는 양측 입구는 현실로 통하는 입구의 역할을 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20321_233106773.jpg

 

 

하지만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은 그 벽을 허문다. 연극 내내 배우들은 무대를 떠나지 않으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에 관객과 같은 역할로 존재한다. 극중 ‘준호’와 ‘희주’가 몰래 만나서 춤을 추는 상황은 관객만이 알아야 하는 사실이며 다른 인물들은 몰라야 하지만 그 상황을 관객처럼 보고 있다. 하지만 배제된 배우들은 모른 척해야 한다. 아이러니 한 연출이다. 관객과 무대 위 배우들만의 암묵적인 비밀이 깨지는 순간이며 모순적으로 지켜지는 순간이다. 기존의 벽을 넘는다. 일반적인 무대와 다르게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무대는 배우들이 무대 뒤로 이동할 수 없다. 양측의 입구를 막은 벽을 세웠지만 오히려 기존의 장애물을 부신 셈이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관객과 무대에 서있는 배우들만의 소통이 존재했지만 무대에 서있는 배우들과 이야기에서 배제된 배우들 간의 소통도 발생한다. ‘희주’가 ‘민지’에게서 훔쳤던 안나수이 손거울은 이야기에서 배제된 ‘민지’가 ‘희주’에게 건네줌으로써 등장하고 ‘영식’이 전학을 가는 ‘준호’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에서 배제된 ‘준호’가 관객의 입장에서 말해줌으로써 얻는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들에게 새로움을 주고 하나의 웃음 포인트로 작용한다. 처음에는 모두 어색하지만 점차 익숙해져 연극의 연출을 관객이 100% 이해한다. ‘베리어프리’. 장애물은 연극의 연출에서만 사라졌을까?

 

 

 

XXL 레오타드를 입은 ‘준호’



HUR_8515.jpg

 

 

장애물을 없애려는 도전은 관객에게도 실천된다. 여자 무용수가 춤을 출 때 입는 옷인 ‘레오타드’는 말 그대로 여성을 상징한다. 그런 레오타드를 남자가 입었다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를까? 나는 개인의 취향이라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어떤 문제가 있지 않을까, 동성애자는 아닐까, 많은 생각이 발생했다. 레오타드를 입은 남성을 상상했다면 연극은 직접 보여준다. ‘준호’가 레오타드를 입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관객이 상상이 아닌 직접 봤을 때의 솔직한 감정을 끌어낸다.

  

여기서 집고 갈 문제는 그런 ‘준호’가 동성애자일까, 변태일까, 그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길 18살이라서 정확히 알진 못한다. 극중 이야기에서 ‘준호’가 동성애자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친구가 있었고 친구들의 스킨십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변태라고 말할 수 없다. 특정한 옷에 대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증상이 있다. ‘준호’는 그런 경우와 다르다. 학업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에서 ‘레오타드’로 안정을 찾으며 레오타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성적으로 흥분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종합해 볼 때 ‘개인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준호’의 친구들인 ‘희수’와 ‘태우’의 말을 들으면 혹시 동성애자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오직 ‘레오타드’를 입었다는 이유로 의심은 생겨난다. 그 의심은 ‘편견’에서 비롯된다.

 

편견. 남자가 레오타드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동성애자일 것이다. 일차원적인 편견은 뇌 속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장애물이 되어 다른 생각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런 의미에서 ‘준호’가 진심으로 레오타드를 좋아하고 ‘희주’가 그런 ‘준호’를 이해해 주는 건 다른 의미로 ‘베리어프리’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 한계도 보여준다. 레오타드를 좋아하는 걸 들킨 ‘준호’가 결국 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아직까지 편견이 지배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장애물을 넘으려는 시도만으로 이 연극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레오타드를 입고 춤을 추는 ‘준호’의 행복한 얼굴이,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아는 소년이 뜀틀을 넘을 발판의 역할을 한다. 이런 레오타드는 ‘준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성별, 나이, 계급, 사회 등 모든 걸 막론하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개인의 취향에서 더 나아가 ‘퀴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의 정체성에서 ‘성정체성’을 생각한다면 ‘레오타드’와 마찬가지로 밝히기 어려운 사실이다. 자신이 레오타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건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준호’가 동성애자야? 이런 의문과는 상관없이 사회에 존재하는 커다란 장애물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또다른 장애물, 안나수이 손거울


 

‘베리어프리’가 실현되진 않지만 사회의 장애물을 보여주는 상징이 있다. 바로 ‘안나수이 손거울’이다. 앞서 ‘레오타드’가 젠더, 편견, 정체성에 대한 상징이었다면 ‘안나수이 손거울’은 ‘계층’에 대한 상징이다. 먼저 무대 위 공간을 말하자면 상류층이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학교다.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부모님의 경쟁도 심하고 학생 간의 경쟁도 뜨겁다. ‘민지’의 엄마는 매년 ‘민지’의 생일 때마다 안나수이 손거울을 주며 말한다.

 

 

썩은 계란이나 고양이 시체, 나방이나 파리는 그런 곳에 앉는 거야.

너한테 나방이나 파리가 앉게 하지 마.

 

 

‘계층’에 따라 장미와 고양이 시체를 나눈다. 극중 ‘민지’와 ‘희주’의 갈등은 계층 간의 갈등을 보여주고 ‘희주’가 ‘민지’의 손거울을 뺏는 건 갈등의 예시다. 엄마가 다 챙겨주고 좋은 학원, 좋은 과외 선생님이 있는 ‘민지’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원비를 충당하는 ‘희주’는 계층 간의 뚜렷한 경제력 차이를 보여준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희주’는 10대 노동자의 표본이기도 하다. 사실 상류 계층의 10대가 10대 노동자의 문제를 겪긴 어렵다.(이것도 편견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하는 ‘희주’가 부당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상황은 계층 문제와 청소년 노동에 대한 부당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손거울 외에도 ‘주거’의 차이 또한 계층 간의 장애물을 상징한다. 좋은 아파트에 사는 ‘준호’는 임대 아파트에 사는 ‘희관’을 무시한다. 그리고 이는 ‘준호’ 또한 계층에 있어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연극 내 모든 학생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관객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대표적으로 관객에게 일침을 가하는 연출은 ‘준호’가 관객에게 건네는 대사다.

  

 

웃어?

 

   

짧지만 강력한 대사다. 연극을 볼 때는 그 대사마저 웃고 넘겼지만 다시 생각하면 무거운 대사다. 레오타드’를 입을 때의 자신을 설명하는 ‘준호’를 보고 관객이 웃을 때 ‘웃어?’ 하고 한방을 날린다. 이야기와 연출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관객과 배우의 소통의 특징으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저 웃겼던 그 상황을 되돌아보게 해줌으로써 사회에 존재하는 젠더, 계급,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생각하게 해준다.

 

 

 

너는 레오타드를 안 입고 버틸 수 있어?


 

HUR_1952.jpg

 

 

버팀. 연극에는 육체적인 버팀과 정신적인 버팀이 등장한다. 체육 입시를 준비하는 ‘희주’의 철봉 매달리기는 모든 버팀에 대한 현실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60초를 넘겨야 합격하지만 ‘희주’는 30초도 못 넘긴다. 연극에 등장하는 젠더, 퀴어, 계층은 버텨야 하는 존재다. 편견이 있는 한 견뎌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직까지 사회는 장애물이 있기에 ‘준호’는 버텨야 한다. 마지막 ‘희주’는 60초는 아니지만 처음으로 30초를 넘긴다. 그렇다. 아직 사회에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점차 장애물은 낮아지고 있다. 완벽한 프리를 향해 모든 버팀의 주체들이 노력하고 있다. 점차 좋아지는 ‘희주’의 철봉처럼 사회에 만연한 편견도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모두가 인정은 해주지 않아도 나의 ‘정체성’을 이해해 주는, ‘준호’가 레오타드가 좋아! 하고 말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아이유’의 ‘팔레트’ 가사가 떠올랐다. 아이유가 25살이 됐을 때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조금씩 알았다고 한다. ‘팔레트’의 가사엔 그녀의 ‘정체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준호’의 팔레트엔, ‘희주’의 팔레트엔 뭐가 담겨있을까. 그들의 가사엔 장애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박성준 태그.jpg

 

 

 

[박성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