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마이너들의 생존기,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공연]

사실 우리 다 ‘별종’이잖아
글 입력 2022.03.2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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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입시경쟁의 불안과 초조함을 여성용 레오타드를 착용하고 사진을 찍는 독특한 취향으로 심적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과외 모임 엄마들의 과도한 통제와 친구들의 선입견 때문에 자신의 취향을 비밀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레오타드를 입은 준호의 사진이 얼굴이 모자이크 된 채로 올라오고 준호는 그것을 올린 사람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희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육 수행평가에서 짝을 구하지 못했던 희주가 준호의 사진을 빌미로 체육 수행평가 과제를 함께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준호와 희주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주변 친구들로부터 의심과 의혹을 받게 된다.
 
- 시놉시스
 

 

‘퀴어, 그리고 10대 노동자’ 연극 소개 글 앞에 적힌 두 단어에 이미 매료되었다. 극의 제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주제를 공식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충분히 향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를 중심에 두고 진행했던 초창기 연극과 달리 미투와 코로나를 거치며 캐릭터에 대한 다층적 이해와 변화를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고 극단은 말한다. 그들의 말처럼 극에서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젠더, 노동, 소수자 등의 다양한 주제가 드러난다.

 

극을 본 후 ‘청소년’과 ‘젠더’ 두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특히 청소년과 그들이 오랜 시간 몸담은 학교, 그 공간에 짜인 구조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다양한 서사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청소년이다. 따라서 극 전반에 걸쳐 발화되는 욕, 혐오, 왕따 등의 행위는 오롯이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주체적이기를 강요당하는 동시에, 어른들이 짜놓은 경쟁의 구조와 법칙 속에서만 살아가도록 설계된 가장 객체화된 존재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학교는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의 주된 대화 내용과 최종 목표가 입시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속에서 등장인물은 서로를 생존을 위한 협력자이자 언제든 달려들어 물어버릴 적으로 인식하는 묘한 긴장감을 보인다.

 

그렇기에 절친한 사이임에도 부자 동네인 ‘3단지’에 사는 준호는 ‘임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특별 과외에서 배제한다. 이런 분리는 양육자의 신앙 설교를 그대로 옮겨 게이를 혐오하거나, 왕따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이렇듯 연대에 앞선 분리를 내면화하는 게 익숙한 그들은 한 개체라기보다는, 양육자의 기준과 생각을 그대로 흡수하고 발화하는 도플갱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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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에 매진하는 모습 외에도 객체화된 청소년의 모습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10대이자 노동자의 정체성까지 가진 희주는 구조의 분명한 피해자다. 희주는 양육자의 이혼 이후 스스로 자신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미 ‘어른의 보호 속에서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청소년의 이상적인 삶은 그와 동떨어져 있다.

 

온전한 개인으로서 존중받지 못한 청소년의 정체성은 노동자로서도 정당히 인정받지 못하고 어른에 의해 착취당하는 희주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보호라는 명목 아래 그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전락시켰지만, ‘청소년다움’이라는 프레임이 결국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청소년이 수용해야 하고 수용할 수 있는 개념이 점차 넓어지고 다변화되지만,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존재는 당사자성을 잃어버린 어른이다. 그들만이 세계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구조가 아직도 유효한가. 그 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일탈’을 개인의 몫으로 치환하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은가.

 

왕따라는 개념을 알고 있음에도 학생에게 ‘자율적으로’ 파트너를 구하라고 지시하고, 이에 실패하면 일방적으로 훈계할 수 있는 교사 영길의 위치는 자율적인 것만 같은 학교가 사실은 얼마나 위계적인지를 보여준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하는 낡은 인식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도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학생 개개인에게 큰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는 ‘좋은’ 교사임에도 말이다.

 

이 말들이 청소년의 부적절한 행위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결국 혐오와 일탈과 범죄를 선택한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속한 공간은 청소년이 직접 선택했다기보다는 어른 세대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린 것에 가깝다. 따라서 그들의 협소하고 위계적인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의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할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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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제 외에도, 남성이자 여성용 레오타드를 입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준호에게서 젠더 개념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준호의 취향은 온전히 개인의 영역에서 소화되어야 하는, 타인에게 비난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는 취미이다. 그는 ‘여성용’ 레오타드를 선호하지만, 그에게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레오타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계기는 누나의 여성용 레오타드이기 때문에, 그가 이에 애정을 갖는 건 당연한 논리의 흐름이다. 여와 남의 구분은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기에 그 개념에 따라 자기 취향을 바꾸는 건 개인성 침해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준호가 속해 있는 사회는 오히려 틀에 맞춰지지 않는 준호 개인을 이상하게 여긴다. 사진 속 준호, 그러니까 '여성성'을 내보이는 남성에 대해 학생들은 게이라고 칭한다. ‘남성성’을 포기한 남성은 ‘여성스러운 남성’인 게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청소년들에겐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만이 존재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 젠더와 다양한 성소수자를 아울러 포함하는 ‘퀴어’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퀴어는 과거 성소수자만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현재 더 확장된 의미로 성별의 이분법적 구분을 부정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성애자임에도 당연히 퀴어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는 여성성의 부정과 해체를 지향하면서 점차 모든 이분법적인 차별을 부정하는 페미니즘의 개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퀴어’라는 개념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사람을 아우르는 언어가 된다.

 

이러한 개념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접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학교 속에서 등장인물이 ‘퀴어는 게이’라고 생각하는 맥락을 이해할 순 있다. 다만 극의 전반에 걸쳐 그러한 편견과 혐오가 많이 이뤄진 만큼 단 한 번이라도 넓은 의미로서의 퀴어를 언급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마지막에 퀴어를 대표하는 무지개색 양말을 착용함으로써 준호가 자신의 ‘퀴어함’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퀴어를 단순히 게이라고 여긴 오해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자신을 게이로서 정체화했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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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가 어떠한 정체성을 받아들였나를 논하기 전에, 그를 향한 혐오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준호의 친구와 애인은 그의 ‘독특한’ 취미를 알고 바로 거리를 두게 된다. 이러한 단절은 준호가 단순히 ‘게이’로 평가됐고, 그에 관한 여러 무지와 혐오가 작용했기에 벌어졌다. 그들에게 그동안 쌓아온 서사는 마치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보다 그들이 함께 쌓아온 역사가 더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까. 그것이 상식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한 존재는 여러 정체성의 합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 때문에 완전한 기득권인 동시에 소수자가 되기도 한다. 가장 큰 피해자처럼 보이는 준호도 마초적인 남성의 모습과 자본이 풍부한 가정의 소속원으로서 권력이 약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희주 또한 왕따지만 준호를 협박함으로써 우위를 점하기도 한다. 상대적 권력 속에서 행동과 위치는 계속 변한다. 그렇기에 한 개체는 어느 몇 가지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 개념이 고정적이지도 않다.

 

어느 정체성이나 사회와 부조화되는 특징은 있다. 그 특징 자체보다는, 이를 과잉되게 드러내며 사회와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고 특정한 정체성만을 정상으로 공고히 하려는 타자화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의 구조는 어떠한 대상에게든 유사하게 재현된다. 그렇기에 자기가 뱉은 혐오 논리는 그 대상과 소수자로서의 자기를 향하는 양날의 검이 된다.

 

언제든 피해자와 가해자가 전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이 굴레에서 가장 이로운 것은 무엇일까. 당연하게 자기 가해자성을 억압하고 다른 특징을 핍박하지 않는 것이다. 혐오의 굴레가 반복되는 한, 개인은 자신을 더욱 드러낼 수 없고 점차 고립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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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에서 준호가 희주를 용서한 것에 대해 의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희주의 행동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준호 취향의 취약점을 알고 의도적으로 아우팅(outing)했고, 끊임없는 재생산이 이뤄지는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다. 그의 행위로 인해 준호는 평생 기록을 지우지 못하고 꼬리표 속에서 불안해하며 불균형한 관계를 맺게 될 가능성이 있다. 준호가 끝내 자신을 긍정하고 세상에 내놓았지만, 그가 만약 평소 자신을 수용하지 못했거나 혐오를 피해 다른 공간으로 도피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환경이었다면 과연 그는 자기 긍정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희주는 준호의 취미를 유일하게 수용한 인물이다. 낯섦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이 혐오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협박을 통해 역설적으로 준호를 인정하고 내면을 끌어낸 것이다.

 

극의 후반부에서 희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준호의 행동은 적어도 지금은 희주를 악랄한 범죄자로서만 인식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물론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마음이다. 누군가는 준호에게 희주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주었으니 애초에 용서하는 게 개연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으로서 누군가의 삶을 해석하는 것은 무례할 수 있다. 개인의 서사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어도 강요할 순 없다. 결국 해석은 본인의 몫이다.

 

다만 자신과 타인을 수용할 수 있음에도 부모에 의해 억지로 전학을 가게 되는 준호는 끝까지 마이너였다.

 

*

 

연극에서 그들이 고군분투한 것은 오롯이 나답게 살기 위함이었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일인 것이다. 청소년기 때부터 경험하는 권력적인 구조, 이미 내면화하여 굳어버린 습관을 지닌 개인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막막해 보인다. 곪아버린 부분을 도려내는 일은 마땅히 사회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이미 충분히 하는 것 같다. 계속해서 용기 있게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고 연대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희주와 준호가 끝내 분리가 아닌 연대를 선택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할 수 있다. 사실 모두가 자신을 억누르며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나와 타인을 짓누르고 있던 힘을 조금씩 빼보자. 그 힘으로 서로를 껴안아 보자.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도 좋지 않은가.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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