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해할 수 있는 슬픔 [도서/문학]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2021)
글 입력 2022.03.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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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소설부터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까지 이야기가 있는 콘텐츠라면 뭐든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즐겨 보면서도 웃거나 울어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에 몰입하면서도 웃음이나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꼭 울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괜히 감정이 메마른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 운다. 소설을 보면서도, 드라마를 보면서도 계속 눈물이 나온다. 막상 이렇게 되니 나는 왜 자꾸 울까 생각한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왜 자주 울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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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에는 남편과 이혼한 후 도망치듯 ‘희령’으로 떠나온 ‘지연’이 있다. 지연은 도망쳐 온 그곳에서 우연히 이십여 년 만에 할머니를 만난다. 지연과 할머니는 어색하고도 따듯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묘한 우정을 느낀다.

 

할머니는 지연에게 여자 둘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지연과 쏙 빼닮은 사진 속 여자는 지연의 증조할머니 ‘삼천’과 그의 친구인 ‘새비’였다. 그 사진을 시작으로 할머니는 지연에게 증조할머니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밝은 밤』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는 지연과 엄마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흘러간다.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비난 받으며 살았던 증조할머니 삼천,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한 채 전쟁이라는 어둠을 헤치며 살아온 할머니 영옥, 그런 영옥과 가정환경에 상처를 받으며 자란 엄마 미선, 남편의 외도 때문에 이혼을 하고도 가족들의 부끄러움이 된 지연. 4대에 걸친 여성들은 각자의 어두운 밤을 견뎌왔다.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 …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 p.220

 


어둠을 견디는 방법은 체념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p.54)이라고 증조할머니가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엄마에게, 엄마가 지연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런 식의 방법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화나게 했으며, 결국은 스스로를 잔인하게 비난하고 함부로 대하게 만들었다. 모녀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받았고 상처를 냈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p.102) 친구가 있었다. 삼천의 곁에는 새비가 있었고, 영옥의 곁에는 희자와 명숙 할머니가 있었으며, 미선의 곁에는 명희 아줌마, 지연의 곁에는 지우가 있었다. 삼천이는 아기를 낳고 힘들어하던 새비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적은 편지를 매일 건넸고, 지우는 이혼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지연에게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p.102)이라 말한다. 지연의 눈에는 차갑기만 한 미선 또한 어머니의 수술비가 모자란 명희에게 기꺼이 큰돈을 빌려주었다.

 

그들 사이에는 “슬픈 마음”과 “다가가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깃든 깊은 애정”(p.198)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함께 슬픔을 나누는 ‘희미한 빛’ 같은 존재들 덕분에 그들의 밤은 ‘밝은 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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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할머니의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바로 그 존재들을 깨닫는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엄마를 거쳐 지연에게로 전해진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마음을 터놓고 울게 하는 것은 모욕과 상처가 아닌 사랑과 우정임을 알게 했다. 또 그 이야기는 상처를 마주보고 분노를 발산할 용기와 힘을 주었다. 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지연은 서로에게 남긴 상처마저 포기하고 체념하려 했으나, 결국은 그 상처를 마주보고 감정을 터뜨린 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지연은 증조할머니의 삶과 할머니의 삶,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4대에 걸친 그들의 삶의 이야기, 그 속에 녹아 있는 우정, 사랑, 슬픔, 그 모든 감정은 현재의 지연에게로 와 위로를 건넨다.

 

소설을 쓰는 동안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도망쳐 온 곳에서 만난 우연한 이야기는 지연의 몸과 마음을 다시 만들어낸다. 자기 자신을 속이며 안으로 곪아가던 지연은 이제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마음’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 p.299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험해본 일이 많아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많아진다. 하지만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타인의 고통을 쉽게 재단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읽는다. 이야기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슬픔들을 알려주고, 이해하게 한다.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그의 슬픔과 기쁨에 공감한다.

 

이야기를 읽을수록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은 늘어날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슬픔과 사랑의 경계를 넓혀가며 자주 울고 많이 웃으려 한다. 더 자주 울면서 나의 슬픔을 이해하고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하며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런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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