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엄마는 고양이 눈이 무섭다고 했다. [동물]

불현듯 찾아온 만남처럼 불현듯 찾아온 이별의 무게
글 입력 2022.03.1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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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아. 안녕, 빙고.



"나는 고양이 눈이 너무 무서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17살의 나에게 엄마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길게 찢어진 동공이 이전에 키웠던 강아지와 전혀 달라서 금방이라도 할퀼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내 눈에는 귀엽기만 한 동물이 무섭다니.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어린 마음은 도통 이해를 하지 못했고, 나는 고양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눈치를 살살 보면, 심하게 반대하는 모양은 아닌지라 더 떼를 썼었던 것 같다. 엄마의 반응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면 들어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엄마가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는 이별을 겪고서야 깨달았다.


미적지근했지만 긍정적이지는 않던 엄마의 반응에 포기하고 있을 때쯤 생명 하나가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한 생명의 방문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우리 아이는 어미에게 버려진 아이였다. 이미 한차례 사는 곳을 옮긴 어미를 따라가지 못했다. 뒷다리가 조금 뒤틀려 있던 탓이었다. 높게 쌓아놓은 장작 꼭대기에서 서글프게 울어대던 아이를 아빠가 조심스레 땅으로 내려놓았다. 금세 어미를 뒤따라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조그만 것이 기를 쓰고 따라간 건 장작 꼭대기에서 내려준 아빠였다. 고양이의 인연은 고양이가 선택한다고 했던가. 소위 말하듯 아이가 '간택'한 건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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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학교에 있던 나는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문자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막상 찾아온 생명은 한 손에 올라올 만큼 작은데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이미 이전에 이별을 겪어본 탓이었다. 사실 이 아이 이전에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웠었다. 5년쯤 살다가 아파서 무지개다리를 건넜던 우리 첫 번째 아이. 작은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대는 고양이를 보며 그 아이가 떠올랐다. 몇 날 며칠을 울었었다. 수업을 듣다가, 버스를 타다가, 잠을 자다가. 그때는 그저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한창 슬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위로가 아닌 말을 건넸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다 안 했잖아."


아이가 아플 때 나는 뭘 했지. 그리고 그렇게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서는 또 뭘 했지. 그냥 내 감정을 내세워 우는 것이 다였다. 내 손 위에 떨어지는 눈물은 금방이라도 말라서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


그래서 그 작은 고양이에 대한 기대는 마음속에서 꾹 접었다. 너무나도 작았기에, 너무나도 아픈 아이였기에. 입에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따듯한 물이 담긴 병을 수시로 갈아주고, 계란을 삶아 노른자를 으깨 먹이고, 등을 톡톡 두드려 트림을 시켜주고. 고양이 눈이 무섭다던 엄마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연신 닦아주며 밤낮 할 거 없이 수시로 보살폈다. 그렇게 얼마 살지 못할 거라며 정을 붙이지 않게 노력하던 그 아이는 빙고라는 이름을 갖고 다음 해 여름, 6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또 다른 만남과 또 다른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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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아무도 없는 무척이나 더운 초여름이었다. 처음 새끼를 낳는 데다가 일찍이 어미와 떨어진 아이였기에 모성애가 없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빙고는 아무도 없는 사이 6마리의 새끼를 낳아 핥아주고 있었다. 빙고를 닮은 삼색이가 둘, 고등어 무늬가 하나, 개나리같이 노란 아이가 하나, 하얀 바탕에 검은 칠을 한 아이가 둘. 다섯을 열심히 핥으며 누가봐도 완벽한 어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섯. 아이가 보살피는 새끼는 다섯이었다. 나머지 한 아이, 하얀 바탕에 검은 칠을 한 아이는 다른 생을 맞이하러 급하게도 떠났다.


빙고는 제 어미와 일찍 이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미 노릇을 완벽하게 해냈다. 마치 이별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분명 그 약한 아이에게 이별의 순간이 있었는데 말이다. 새끼들 모두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리고 새끼들이 독립할 때가 됐을 때쯤 빙고는 새끼들에게 모질게 굴었다. 그맘때 새끼를 기르는 어미 고양이에게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빙고는 그렇게 혼자 또 다른 만남을 위해 또 다른 이별을 준비했다. 그렇게 3마리의 새끼가 다른 집사를 찾아갔고, 2마리만 아이와 함께 자랐다.


빙고와 두 새끼들은 건강하게 자랐다. 계속 건강하게 자랐으면 했다. 이미 세 아이들은 내 일부였고, 내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불현듯 찾아온 만남처럼 불현듯 찾아온 이별은 막을 수 없었다. 몇 년 후 빙고의 두 아이들은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네가 마지막이야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처럼 퇴근길에 엄마에게 안부차 전화를 했는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자취방까지 걸어가며 엉엉 울었다. 주변에서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우는 것도, 걷는 것도. 한 번 겪어서 무뎌질 줄 알았던 슬픔은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렇게 무서워서 정을 주지 못했던 아이에게 정을 줘버린 순간 슬픔을 끝에 둔 기쁨이 점점 쌓인 거였다. 쌓인 기쁨이 높을수록 무너짐은 더 처참했다.


평일을 마치고 주말이 되자마자 집으로 내려왔다. 세 쌍의 눈동자 대신 한 쌍의 노란 눈동자만 나를 보고 있었다. 반기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고 또 왈칵 눈물이 났다. 방에 들어가 두 아이의 인식표를 손에 쥐고 엉엉 소리 나게 울었다. 손에 툭 닿는 보드라운 느낌에 고개를 드니 빙고가 뛰어들어와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곧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 순간 첫아이가 생각났다. 강아지별에서 뛰놀고 있을 첫 번째 아이. 처음 빙고를 보고 첫아이를 떠올리며 한 생각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내가 한 게 뭐지. 내가 할 게 뭐지. 빙고의 새끼들은 먼저 떠났지만 빙고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눈물을 벅벅 닦고 간식을 꺼냈다. 먹기 좋게 뜯어주며 잘 먹는 걸 가만히 쳐다봤다. 간식을 다 먹으니 언제나처럼 햇살이 좋은 현관에 누운 빙고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엄마는 집에 와서도 고양이별에 있을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을 보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아주 나중에 빙고를 보내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어린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항상 단단해 보이던 엄마의 약한 모습을 빙고로 인해 처음 보게 됐다. 엄마는 그날 한참 빙고를 쓰다듬었다.

 

 


무너지는 게 무서우면 쌓지 않으면 돼



나는 사진을 찍는 걸 참 좋아했다. 내가 찍히는 건 다른 문제였지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이것저것 찍는 게 그렇게 좋았다. 그래서 휴대전화에는 항상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빙고가 오고 난 후로는 빙고 사진이,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아이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런데 불현듯 찾아온 이별은 내가 좋아하는 것조차 망설이게 만들었다. 만약에 빙고가 고양이별로 가버리면 이 사진들을 볼 수 있을까. 날 더 무너지게 만들지 않을까.


펫로스(Pet loss) 증후군이라고 했다. 반려동물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진 사람이 겪게 되는 우울함, 무기력함, 상실감.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잃었을 때에 버금가는 아픔이라고 했다. 그리고 극복하는 법은 극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현실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세상으로 갔고, 나는 여기 빙고와 함께 남겨져 있는 현실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빙고도 언젠가는 우리의 품을 떠날 거라는 것을. 이 현실은 추억이라는 것, 기쁨이라는 것을 쌓기 어렵게 만들었다. 나중에 닥칠 아픔이 지금의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내가 또 무너져버리면 어떡하지. 한참을 괴로워할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너지는 게 무서우면 쌓지 않으면 되잖아.'


지금의 내가 빙고의 사진을 많이 찍지 않게 된 이유였다. 단지 추억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현재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귀여운 포즈를 하고 있는 빙고를 보면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을 찍기보다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추억이라는 것을 위해 기쁨을 쌓아놓기보다는 현재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기로 했다. 지금도 옆에서 잠꼬대를 하는 이 아이를 동영상으로 찍기보단 편히 자라고 쓰다듬어 준다.


미래에 다가올 일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가끔 엄마와 빙고가 없을 어느 시점의 미래를 생각하면 코가 시큰거린다. 다만, 지금은 지금을 살아야 한다. 지금 내 옆에 살아 숨 쉬는 아이를 마음껏 사랑해 줘야 한다. 미래가 무섭다고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빙고는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불현듯 다가오는 불행이 우리를 무너뜨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행복은 지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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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는 내 아이, 내 고양이 빙고, 내 세상을 위해서 오늘도 오늘을 온전히 오늘로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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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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