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떠나고, 또, 떠도는 이야기 -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공연]

여정 속에서 극단 하땅세가 전하는 따뜻한 위로
글 입력 2022.03.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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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라이트 하우스에서 극단 하땅세의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를 관람하였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2021년 제4회 중국 희곡 낭독 공연을 초연으로 국내 관객들과 만나고,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공식 초청 선정작이었던 작품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에는 극단 하땅세의 작품이라는 이유가 컸다. 극단 하땅세는 윤시중 연출가를 중심으로 연극 <위대한 놀이>, <그때, 변홍례> 등의 개성 짙은 작품을 창작하며 국내외 유수의 연극제에서 각종 상을 수상한 극단이다. 극단 하땅세의 작품은 늘 작품 전반에 걸쳐 공간과 사물이 가진 특성을 다채롭게 활용하고 배우들이 일인 다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나가며 이야기를 흡수력 있게 전개해 나간다는 특징이 있다. 하땅세는 장면 하나하나를 허투루 흘러가 버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늘 유쾌하고 기발하다. 무엇보다 누구나 쉽게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관객의 손을 꼭 잡고 하나둘씩 정성스레 빚은 장면들을 친절하게 꺼내 보이는 듯하다. 눈이 닿는 장면의 모든 순간에는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난다.

 

이렇듯 늘 필자의 기대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극단 하땅세의 작품이기에, 이번에도 주저 없이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를 관람하였다. 작년에 관람할 기회를 연달아 놓치면서 이렇게 늦게나마 리뷰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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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하남 연진의 양 씨 마을,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무시당하며 살던 두부집 아들 '양백순'이 살의가 생길 만큼 상처가 깊어지자 결국 마을을 떠난다. 그러던 중 '첨' 신부를 만나 '양모세'로 개명하고, 만두집 '오향향'네 데릴사위가 되어 '오모세'로 살아간다. 아내 '오향향'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자, '오모세'를 따르는 '오향향'의 딸 '교령'을 데리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오모세'가 잠시 한눈판 사이 '교령'이 쥐약 장수에게 유괴 당하자, '교령'을 찾지 못한 '오모세'는 허탈감으로 삶의 목표를 잃고 연진을 떠나는데···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중국의 작가 류전윈(劉震云, 1958~)의 대표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의 장편소설을 중국 실험극의 선구자라 불리는 연출가 머우썬(牟森, 1963~)이 각색, 2018년 북경을 초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를 오수경 번역, 김옥란 드라마트루기, 그리고 윤시중 연출가와 극단 하땅세가 만나 국내 공연으로 새로이 탄생시켰다.

 

소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연진을 떠나는 이야기', 2부는 '연진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1부의 중심인물이 '양백순'이라면, 2부의 중심인물은 그의 외손자인 '우애국'을 중심으로 한다. 김옥란 드라마트루기 글에 의하면, 1부는 '양백순'이 고향 연진을 떠나는 이야기이고, 2부는 '우애국'이 엄마 '교령'의 유언에 따라 '양백순'을 찾기 위해 연진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1부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곧 신중국 성립 이전이 배경이고, 2부는 그 이후가 배경이다. 필자가 관람한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1부고, 2부는 올해 9월 극단 하땅세에서 뒤이어 신작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미련 없이 떠나시게" · · · [누군가]의 [어느] 여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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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극단 하땅세

 

 

'양백순'. 그는 말주변도 없고 항상 어딘가 모르게 몸이 축 처져있어서 바람 빠진 풍선을 마치 사람으로 형상화한 것만 같다. 그는 하남 연진 양씨 마을 사람이지만 두부 장수인 아버지에게 타박을 받고 두부 장수를 하기 싫어 마을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여정이 시작된다. 이탈리아인인 '첨' 신부를 만나고 이름을 '양모세'로 바꾼다. 그는 '증씨'를 만나 돼지 잡는 사람이 되었지만 말 한마디의 오해로 그를 떠나게 되고, 만두가게 주인 '오향향'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성을 '오모세'로 바꾸며 만두를 팔지만 서툰 말주변에 말 잘하는 '오향향'보다 만두를 잘 팔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만두가게 데릴사위로 정착하여 살아갈 것 같던 '오모세'. 그러나 그는 이내 곧 또다시 여정을 떠나게 된다. 자신의 아내 '오향향'이 '고씨'와 바람이 난 것이다. 그는 딸 '교령'과 함께 집 나간 아내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결국엔 가난에 허덕이는 '오향향'과 '고씨'를 발견하지만,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오향향'의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본다. 여기서 치정 극으로 결말을 맞을까도 싶었지만 작품은 또 한 번 더 예상을 벗어난다. '오향향'과 '고씨'는 가난함에도 너무나 행복해 보였고, 결국 그는 자신이 '평생 모를', '고씨'가 '오향향'에게 내뱉었을 말 한마디에 대해 절망한다. 뒤이어 '교량'은 유괴되고, 극은 막을 내린다.

 

'양백순'의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은 삶의 여정. 그 속에서 그는 굳이 자신이 의도치도 않은 수많은 만남이 이어지고 직업이 바뀌면서 이름도 '양백순'에서 '양모세', '오모세',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장례'로 바뀐다. 그의 여정에는 두부 장수, 도축업자, 이발사, 신부 등,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품은 신중국 전의 기나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역사의 흐름과 이들의 연결고리는 미미하다. 이들은 그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왔었던 지극히 평범한 시골 사람들 내지는 상인들이다. 총 무려 40명이 넘는 배역이지만 작품에서는 오로지 12명의 배우들이 일인 다역으로 이를 소화해냈다.

 

중심인물 '양백순'은 늘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며 떠돈다.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매번 고민한다. 그의 삶에는 끊임없이 말 한마디들이 이어지고, 그는 작은 물살에도 흔들리는 부표처럼 이리저리 떠돈다. 정착하고 이제 좀 안정적으로 살게 될까, 기대하는 관객들의 예상을 연달아 뒤집는다. 필자 또한 매번 남들에게 속고, 타박 듣고, 당하기만 하는 그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의 삶이 이제는 좀 순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면을 보다가 결국 공연 말미에 이르렀다. 예상치 못한 결말로 점점 치달으면서,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까지 알 수 없는 깊은 울림이 마음을 휘감았다. 그리고 바로 불현듯, 어디에선가 읽었던 어록 하나가 스쳤다. "인생이란 네가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쁠 때 너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존 레논, John Lennon, 1940~1980)

 

순탄한 삶. 안정적인 삶. 혹은 무언가 목표를 이뤄낸 성취 있는 삶.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잘 먹고 잘 살' 방법을 궁리하며 각자의 삶의 목표를 좇으며 살아간다. 마치 극 중 '양백순'처럼 말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고작' 말 한마디에도 쉽게 오해하고, 절망하고, 사랑에 빠지며, 누군가의 삶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말이 늘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쳐 이리저리 깎이고 부풀려지며 떠돌 듯, 우리의 삶도 누군가와 끊임없이 부대끼며 더해지고 깎이는 듯하다. '양백순'의 말 한마디가 그랬고, '양백순'의 삶 자체가 그랬듯이 말이다.

 

속도감 있는 극을 쉴 틈 없이 달리느라 숨찼던 필자는 극장을 나오고 나서야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나 자신도 언젠가 이 모든 아이러니함을 짊어지고, 작품 속에서 등장한 "미련 없이 떠나시게"의 외침처럼 조금은 더 '미련 없이' 떠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성북구의 [어느] 주택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하며 마당에 소박한 감나무가 있는 '라이트 하우스'라는 주택이 무대이다. 가정집을 개조한 이 '라이트 하우스'에서 한 회에 오직 20명의 관객과 만나 공연을 펼친다. 주 무대가 되는 집의 마루는 물론이고, 화장실과 부엌, 그리고 관객석 뒤쪽 문까지 모든 공간이 무대가 된다. 더불어 집의 양옆 창문과 관객이 입장했던 집의 출입구까지 모두 장면의 소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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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라이트 하우스' 외부 전경 / 사진ⓒ=필자본인(이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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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라이트 하우스' 내부 모습 (부엌과 화장실이 보인다.) / 사진ⓒ=필자본인(이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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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라이트 하우스' 부엌과 화장실 안쪽 모습

(음향 효과를 내기 위한 각종 물품들이 놓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사진ⓒ=필자본인(이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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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라이트 하우스' 부엌과 화장실 벽에 붙은 다양한 인물 사진들

(배우들이 연기할 때 참고한 인물들이라고 추측된다.) / 사진ⓒ=필자본인(이다영)

 

 

배우들은 일부 장면에서 이따금 전동 드라이버를 가지고 집의 벽을 구성하는 합판을 떼고 붙이며, 심지어 자르기까지 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배우들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장면들. 그리고 이를 잇는 극단 하땅세만의 일상의 오브제로 빚어낸 유쾌한 연극적 미장센까지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극 중 종종 등장하는 아코디언 연주는 밝으면서도 괜스레 심금을 울린다. 속도감 있는 장면들과 많은 등장인물 탓에 자칫 관람 중 극의 흐름을 놓치거나 중구난방함을 느낄 수도 있으나, 공연 내내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친절히 전개되는 내레이션이 그 단점을 메꾼다. 결국엔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으로, 투박하고 좁은 집이 근사한 연극 무대로 거듭난다. 배우들의 이마에 맺히는 땀줄기가 늘어날수록, 20명 남짓한 관객들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성북구의 [어느] 주택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필자는 특히 극단 하땅세 특유의 연극적 미장센을 애정 한다.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익숙하지만 새롭다. 쉴 틈 없이 무대 위에 오르는 일상의 재료들은 새로운 무대 언어로써 거듭나고, 마침내 공감과 해학을 자아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 짓게 한다. 예술적 깊이와 더불어 예술의 공공적 가치를 공존시킨다는 목표로 관객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고자 한다는 극단 하땅세. 앞으로의 극단의 행보에 기대하며, 무엇보다도 올해 하반기 공연 예정인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2부> 작품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그리고, 성북구의 [어느] 골목



극장 '라이트 하우스'는 성북구의 주택가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극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성북구의 주택가를 지나쳐야만 했다. 필자는 여유 있게 출발하였으나 그곳이 초행길이라 그런지 도중에 크고 작은 골목길들에 뒤엉켜 길을 잃으면서 공연 시작 전 간신히 극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를 예상한 것인지 극단 하땅세 측에서도 사전에 문자 메시지를 통해 넉넉히 공연장에 오기를 당부한 듯하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골목은 한산했고, 가로등 몇 개와 주택가에서 새어 나오는 빛들로 간간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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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필자본인(이다영)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선 뒤 이 성북구의 [어느] 주택가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극장으로 향할 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하나둘씩 눈에 밟혔다. 골목 양옆에 오밀조밀 단란하게 줄지어진 빌라와 주택 건물들. 가로등 탓에 오렌지빛으로 물든 그 길을 찬찬히 걷다가 그만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눈길이 닿는 모든 것에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었고, 이는 누군가가 일상을 살아가는 한구석의 단면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면 저 너머로 아득히 높은 건물들의 빛이 보였다. 뒤를 돌면 낙산공원의 성곽이 빛나고 있었다. 성북구 특유의 그 풍경들에 젖을 수밖에 없었던 밤 골목이었다.

 

'라이트 하우스'로 공연 장소를 정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았을까. 투박한 삶의 흔적이 빈틈 없이 묻어난 그 골목 전체가, 누군가의 치열한 여정을 담아내고 있었고, 필자는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그 일련의 것들을 마주하며 건너가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감성에 젖어들 때쯤, 주머니 속 뜨거운 군고구마가 느껴졌다. 공연이 끝난 뒤에 관객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던 군고구마였다. 주머니 속 군고구마의 따뜻함에 손을 녹이다가, 극 중 '양백순'이 쉽지 않은 떠돌이의 여정을 하던 중 먹었던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이 떠올랐다. 작품에서 '양백순'은 길을 떠돌던 중 배를 곪다가 국숫집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는 장면이 약 두 차례 등장한다.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국수를 정말 소중하게, 그리고 맛있게 먹는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먹는 그 국수 한 그릇의 따뜻함이 잔뜩 몰입하며 극을 보던 필자의 마음까지 사르르 녹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 따뜻함을 기억하며. 떠나는, 그리고 또 떠도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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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따뜻했던 군고구마 / 사진ⓒ=필자본인(이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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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커튼콜 이미지 / 사진ⓒ=필자본인(이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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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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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군고구마
    • 성북구의 주택가 극장..관람후 골목길의 분위기가 상상만으로 눈물나녜요..
      좋은 글..마음이 쓸쓸한듯 따뜻해집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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