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의식의 흐름 – 돈, 마음, 관계

글 입력 2022.03.0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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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머무르는 것들이 물리적인 질량을 가졌다면, 이미 당신의 속에는 깊은 고랑이 파였겠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생각은 질문을 만들어내고, 질문은 답변을 이끄니까요.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방법으로 철학을 탐미했다고 하지요. 별거 아닌 것 같은데도,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를 갖다 붙이니까 있어 보이죠? 웬만한 글쓰기는 이렇게 하면 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저도 멋진 질문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멋으로 꾸미기만 한 질문은 아닙니다.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당신은 육체의 실존에 그치지 않고, 거칠게 박동하는 자아로서 존재합니까?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지나요? 그렇다면 당신의 존재는 무엇을 위해 자리합니까?

 

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이런 질문을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므로, 혼자만의 고민을 이어가다 역사가들의 지식을 빌리기로 했지요.

 

성경과, 소설, 철학서를 읽었습니다.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곱씹었어요. 인류가 오래도록 고뇌했던 생각을 어떻게든 풀어보려 애썼습니다. 그 안에 무언가 배울 것이 있기를 바랐고, 나아가 제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로부터 얻은 수확이 없지는 않았으나, 갈급한 자아와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만이 창조할 수 있는 언어로 해답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 찾았고, 먼저 발견한 것은 글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문득 저의 언어가 너무 사변적이며 현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앉아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타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내뱉은 말에 책임지지 못하는 소시민. 머릿속에 든 생각을 쏟아내는 것이 직업인 사람. 아니,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조차 없으면서 작가나 예술가, 기자 따위로 직업을 포장하는 은둔형 외톨이.

 

외톨이는 불평이 많답니다. 요즘 저의 불평 레이더에 포착된 목표물은 ‘돈’이죠. 돈의 능력은 아주 뛰어납니다. 인간에게 놀라운 자긍심을 선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도 만들지요.

 


돈.jpg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요. 집에서 돈을 보태줄 수 없기에, 저는 월세와 생활비를 벌어야만 합니다. 서울의 좁은 방에 세들어 산다는 것은 돈을 허공에 흩뿌리는 행위와도 같죠. 그런데 왜 서울에 사냐고요? 서울은 제 꿈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이곳이 살기 좋은 동네라 그런 게 아니죠.

 

저는 왜 돈에 얽매이며 살아야 하나요? 아무런 급여도 기대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내보일 생각을 뱉어내는 것. 그것이 저의 직업인가요? 아니면 월세를 벌기 위해 시간제 노동을 하는 것이 저의 직업인가요?

 

“내 가치를 금전 몇 푼에 책정하는 건 참을 수 없어”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그 다짐이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라면 응당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특별할 것 없는 인생에 다시 고개를 떨굽니다. 그러면서 영혼만은 가난해지고 싶지 않았다는 둥, 실없는 불평을 내뱉으며 현실을 책망합니다.

 

그것이 오늘이었습니다.

 

내일은 달라질까요?

 

*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떠오르는 단어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에도 저작권이 생긴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네요.

  

미드나 영드를 보면 ‘Therapy(심리 상담/치료)’를 받는다는 대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보통 권태기가 찾아온 연인이나, 깊은 갈등을 치유하지 못한 가족이 함께 ‘Therapist’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는 하지요. 힘든 상황에서 감정을 제어하는 것, 나아가 정신건강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일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테라피.jpg

<틱, 틱... 붐!>에서는 연인과의 심리 상담을 소재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심리 상담을 받는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문화가 있습니다. 표준과 다른 것은 숨겨야 한다고 여기죠. ‘정병(정신병 내지는 정신병자)’이라는 단어를 쓰며 질병을 앓는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괴물 취급하는 듯한 사람들이 온라인 세상을 활보합니다.

 

만약 제가 ‘정신건강의학과’라는 단어를 ‘정형외과’로 바꾸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사고가 생겨서 다리를 좀 다쳤어요. 정형외과에 갔더니 깁스를 해주고 약도 처방해주더라고요. 지금은 꽤 괜찮아져서 깁스는 풀었는데,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해서 조심하며 걷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걷는 데 힘들지는 않고? 고생 많았다.” 등의 위로를 건넬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신건강 이야기에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독히 부담스러운 압박을 떨쳐내지 못하면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정신건강은 민감한 주제입니다. 타인의 투병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마땅히 대처하는 방법이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해외 드라마에서도 ‘남자친구가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등의 반전 요소는 서사와 갈등의 깊이를 더해주는 장치로 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오은영 박사가 방송에 출연하여 상담의 필요성과 정신건강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설파하고 있어, 국민적 인식 개선이 꽤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타인에게 정신건강 관련 투병 사실을 알린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저도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우울증 관련 글을 게시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글을 써도 되나 고민했지만, 어차피 저에게 관심이 별로 없을 사람들이 사이트에 접속하여 읽을 만한 글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몇 분 정도 읽어볼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쩌면 저는 모니터라는 장벽 뒤에 숨어서 그동안의 고난을 떨쳐낼 대나무숲을 찾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사랑은 열린 문.jpg

  사랑이 열린 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굳이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더라도,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느낍니다.

 

사랑은 존재할까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요? 모든 사람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관계를 맺겠지만, 저는 제가 쓰고 있는 가면이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없는 얘기는 못 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덜컹거릴 때가 종종 있더라고요.

 

저조차도 저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살다가는 슬프게 생을 마감하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불안함과 부족함을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사회화된 동물로서 타인과 저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지만, 완벽한 인간은 제 옆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저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하긴 타인에게 완전한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겠지요. 저도 누군가에겐 그저 그런 사람일 것이고요.

 

저처럼 생각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옆에 두면 그 사람도, 저도 피곤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라서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쉬이 놓아주기는 어렵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보면 관계 맺음의 목적으로 쓰이는 글이니까요.

 

가끔은 나도 사랑받고 싶다면서 울먹이는 어린아이처럼 떼쓰고 싶을 때가 있죠. 제가 그런 심리로 글을 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글로 질척거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주다가 글을 마치게 되었네요. 윤동주 시인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위대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는데,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개인의 고뇌는 쉽게 가늠하기 힘든 것인가 봅니다.

 

별거 아닌 글 같은데 윤동주를 갖다 붙이니 있어 보이죠? 웬만한 글은 이렇게 마무리하면 반은 챙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미상관으로 유명인을 활용했으니 적당히 잘 쓴 글이 완성되었네요. 몹쓸 습관입니다. 제 글이 여러분의 글쓰기에 반면교사가 되기를 바라며 의식의 흐름을 잠시 멈추겠습니다.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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