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과 죽음은 원점으로 '당신이 살았던 날들'

글 입력 2022.02.2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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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거닐다 무심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면 절로 걱정이 된다. 한시가 급하게 움직이는 저 구급차 안에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무사했으면 좋겠다 싶게 걱정스럽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동시에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다. 누구나 사건과 사고에 휘말릴 수 있고 죽음은 언제나 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예상이란 게 들어맞지 않는 분야인데도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에 화가 나고 슬퍼하며 절망스러워할 게 분명하다. 모르는 새 나라는 존재에, 뜻밖에 주어진 삶에 정이 든 게 분명하다.


치킨집이나 코인 노래방이라면 실패하지 않을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했건만, 코로나19로 인해 예상도 깨지고 말았다. 주변에는 하나 둘 코로나19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난다. 몇 백, 몇 천 명에도 놀라워한 것에 비해 수만 명이라는 수치에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초반에는 확진자에게 이목이 쏠리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최근에 복불복이고 걸리지 않으면 친구가 없다는 내용이 기사로 나온다. 죽음이나 병에 익숙해지게 되었다는 게 이상하다. 적응하지 않고 숨는다고만 해결될 상황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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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역사나 사건도, 유대교의 입장이나 해석이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종종 책에서 저자가 모르는 이의 장례식에 잘못 자리 잡았던 것처럼 어색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두 랍비가 뉴욕에서 택시 뒷좌석에 올라탄다. 한 랍비가 다른 랍비에게 말한다. "나는 작고 보잘것없네. 없는 거나 다름없지." 이에 다른 랍비가 한술 더 떠서 말한다. "나는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고, 변화무쌍하고 아무 형태도 없는 허황된 연기라네." 그러자 택시 기사가 그들을 돌아보며 외친다. "아니, 위대한 랍비들께서 지혜를 갖고도 당신이 먼지다, 연기다 하시면, 그럼 나 같은 무지렁이는 뭡니까, 쓸모없고 너절한 쓰레기, 찌꺼기지요......" 두 현자는 즉시 서로를 마주 보며 말한다. "아니 도대체 저자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P.86

 

 

'욤 키푸르'에 랍비가 시너고그 안쪽에서, 혼자 열을 내며 누군가와 말다툼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발견한다. 랍비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한다.

"도대체 누구랑 얘기하는 겁니까?"

그러자 남자는 대답한다.

"주님과 대화 중이었습니다. 그분한테 내가 말씀드렸죠.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전 아주 끔찍한 짓을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어요. 하느님, 당신과 달리 말이죠. 이 세상 꼴 좀 한번 보세요, 우리를 난도질한 고통, 아픔, 대참사를 말입니다. 하느님, 당신이야말로 우리한테 용서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랍비는 묻는다.

"그래서 대화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남자가 말하기를,

"그야 뭐, 이렇게 말씀드렸죠. '제가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이 저를 용서해서 서로 퉁칩시다!라고요."

그러자 랍비는 벌컥 화를 내면서 말한다.

"아니 이 한심한 사람아, 그렇게 거저 하느님을 빠져나가게 놓아줘?" P.121-122

 

 

알쏭달쏭했지만 재밌는 이야기도 많았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엉뚱하거나 재밌는 일화가 많았다. 서로 쓸모없고 쓸데없다고 '쓰레기 배틀'을 하는 이야기와 하느님이 제일 잘못했다고 따지는 이야기. 전자는 훈훈하게 '에이,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럼 너도 나도 쓸모없고 보잘것없다는 걸 지금 알았냐고 하니 통쾌하다. 그래, 우린 다 보잘것없는 존재지, 아무렴. 후자는 나는 그리 잘못한 게 없지만 하느님은 잘못한 게 많다고 당차게 말한다. 하느님이나 나나 서로 용서하자는 평화로운 결말에 왜 따지지 않았다고 일침을 가하는 랍비. 좋은 게 좋지 않냐고 묻는다면 뭐가 좋냐고 째려보는 눈빛이 느껴질 것이다.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보잘것없다고 웅크려있다가도 신을 탓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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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만난 죽음의 스펙트럼이 좁다. 다양하게 삶을 사는 것에 비해 죽음은 시간이 많이 흘러 찾아온 죽음이었다. 주변에서는 호상이라고 했고 역시 다들 많이 울지 않았다. 의외로 펑펑 운 사람은 떠난 분께 생전에 후회가 많을만한 사람이었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 뇌의 세포는 기억을 되짚고, 사람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기억을 보게 된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사람들은 또 지키지 못했던 약속이나 전하지 못한 마음이나 행동을 되돌아본다. 아무래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면서.


스스로 죽음 앞에서 너무 무감각하거나 메마른 건 아닌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왜일까? 기회가 있다면, 시간이 있다면 아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눈물을 흘릴 시간은 많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으니까. 손쓸 틈도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혀 다른 카테고리다.


아니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해서일까. 수많은 추리소설과 만화에는 살인사건이 넘쳐난다. 명탐정 코난에서는 저게 이유일까 싶은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숨기려 애쓰고, 추리로 범인을 맞추면 의외로 순순히 자백을 하는 과정이 100권 내내 진행된다. 오죽하면 탐정이 가는 곳에 살인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까지 한다. 생각해 보면 이 넓은 세상에서 살인사건이 하루에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하다. 오히려 아무도 죽지 않았다면 뉴스에 나와서 축하해야 하는 건 아닐까? 무서워하진 마시라. 추리소설과 만화가 이런 생각도 가능하게 하니까.

 

 

왜 저러나 싶은 우울증 환자들한테 꼭 하는 말 있잖아. '몸 건강하죠, 자식들 걱정 없죠, 어머니를 아끼는 손주들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자포자기하시면 안 돼요......'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그런 말은 순 엉터리야,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 이 말이야. 우울증은 자기 삶에서 만족스럽다 싶은 부분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존재의 좋은 면들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자기가 가진 행운이나 특권을 의식한다고 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앓다 마는 것도 절대 아니란 말이지. 욕망이 죽는다는 게 뭔지 죽어도 모를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나라고 성화인 거야. P.183-184

 

 

염려스러운 건 사람들이 사람을 혐오하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죽음이다. 세상이 망해가는 중이라면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니니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그 골이 절벽처럼 가파르게 깊어져서 끝을 보고야 만다. 뉴스에선 친구, 연인, 지인이었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을, 그 사람이나 가족을 괴롭히고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너무 좋아하거나 사랑해서? 화가 나서? 상처를 준 걸 용서할 수가 없어서? 호기심으로? 어떤 감정이 얼마나 흘러넘쳐야 사람을 죽이는 생각을 넘어 숨을 끊어놓을 수 있을까. 평생 답을 알고 싶지 않은 질문이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윤택해진 것은 무색하게 우울증과 자살이라는 표현은 더 익숙해졌다. 수능 시험을 잘 보지 못해서, 입사한 곳에서 많은 업무나 힘든 사람들을 견디지 못해서,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사랑에 실패해서, 꿈도 희망도 없어서, 무기력한 일상에 지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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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스무 살이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마음이 뒤숭숭했다. 따뜻하게 밥을 먹고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재웠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하면 모든 게 속속들이 절망적인 건 아니니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내라고 한다. 가지지 못한 것,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가능성이 아깝지 않냐면서. 겉으로 보기엔 꾀병처럼 보이니 의심할지도 모른다. 몸이 어디 부러지거나 다친 게 아닌데 손 하나 움직이기 힘들고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니. 우울증은 게으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런 선택을 한다니 무책임한 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남아있는 사람은 안중에 없다면서.


하지만 죽음이 눈앞의 선택지가 된 시점에서 느껴지는 건 전혀 다를 것이다. 의지라는 건 동기부여를 해줄 욕망이나 감정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의지를 끌어올리려고 무리하다가 오히려 더 깊은 욕망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물음표만 남는다. 몸이 게으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약을 먹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도 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데 처방전이 필요한 셈이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서 고통을 안고 가려했을 수 있다.


죽음을 선택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있냐는 질문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은 소중하지만 그 삶의 시작도 풍요로움도 똑같지 않다. 어떤 하루라도 소중하니 그 하루라도 단축할 수 없다는 입장은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괴롭고, 너무 모질고 잔혹한 사람이라 죽음을 선고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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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떠나보낸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건 간에 그로 인한 고통 외에도 생경한 현상을 경험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그 현상이란 말의 공허함과 말하는 사람들의 서투름이다. 당신을 조문하러 오거나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신은 위로한답시고 실언을 하기 일쑤이고, 간혹 망발까지 내뱉는 결례를 범한다. 예컨대 "제일 좋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난다"라거나 "적어도 그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거나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이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며 되지도 않는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갖은 시도를 감행한다. 애도자들은 거기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P.135

 

 

그래서다. 위로가 필요할 텐데도 말을 아끼게 되는 건 어쭙잖은 말을 하게 될까 봐서다. 타인이 악의 없이 뱉은 말이 가끔 늦은 밤이나 현관문까지 넘어서 떠오르곤 하듯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하물며 죽음이야, 살아있는 사람은 시련을 견디려고 애를 쓰지만 같은 입장이 아니면 조심스럽다. 죽음을 조금 덜 두려워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를 추스를 수 있게 바보 같은 연습도 해봤다.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갔을 때 적어도 다른 이들 앞에서만은 침착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의 완벽한 장례식을 계획한 사람이 책에서 나온다고 놀릴 게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연습하는 사람도 여기 있으니까. 오히려 내 죽음은 완벽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바라는 것도 특별히 없다.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책에서는 동생을 먼저 잃은 형이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을 때 생기는 상황인데, 하늘로 갔다고 하면서 땅에 묻는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끼워 맞추자면 마음은 하늘로 가고 몸은 땅에 묻힌다고 이분법적으로 설명했을 수도 있지만, 책에서는 죽음이 질문투성이이고 우리가 각기 다른 표현으로 에둘러 표현할 뿐이라고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임사체험은 할 수 있어도 완전히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우리는 죽음을 표현하는 수많은 표현 중에 하나를 꼽을 뿐이다. 죽었다. 사망했다. 세상을 떴다. 숨을 거뒀다. 유명을 달리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요절했다, 작고했다. 별세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다. 어디로 가는지 안다고 한들, 누가 냉큼 믿어주겠나.


 

죽음을 배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단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모세처럼 돌아서 미래를 본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 미래는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가 막 오른 산의 흙 위에 새겨진 우리 발자국에 있다. 그 흔적 속에서, 우리를 뒤따를 사람들과 우리 뒤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우리가 아직 거기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읽을 것이다. P.221-222

 

 

뱀파이어나 환생, 타임리프와 멀티버스가 흥미로운 소재인 건 죽음에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도 수만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매일 죽는다. 누군가의 죽음에 갖가지 의미를 남기는 건 그가 없는 미래의 사람들이다. 역사란 사람들이 계속 살고 죽으며 이어온 발자국을 위로 다시 발자국을 남기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빠짐없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건 오히려 다행이다. 타임리프와 멀티버스가 주는 교훈이 있지 않나. 어딘가 손을 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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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현자, 소유자, 정착민, 그리고 재물을 획득하고 세상의 영속성을 믿었던 자는 말한다. 모든 것이 아벨이라고, 그는 인정한다. 우리가 튼튼하게 세운 모든 것이 결국 마모되거나 사라질 때, 약하고 일시적이며 빈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지나간 존재의 입김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숨을 불어넣고,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P.271

 

 

우리가 살았던 날. 세기말에는 세상이 망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새로운 세기는 의외로 놀랍지 않게 찾아왔다.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라는 이야기가 되풀이되는데 우습게도 그 말은 매번 맞는 말이다. 모두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람들의 숨은 마스크 뒤에 가려 있고 다시는 보기 힘들 것 같던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입김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지만 수만 개의 결로 바람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죽음도 허망하지 않고, 삶도 허망하지 않다. 삶에 물음표가 가득하듯이 죽음 역시 질문만 가득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돌아온 원점이 그래도 막막하지 않은 기분이다. 이 책이 보여준 입김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원하는 건......"

나는 아리안이 말을 끝내지 못할 것을 알고 말을 거들었다.

"네가 원하는 건..... 두려워하지 않는 거라고?"

"뭐래, " 아리안이 말했다. "초밥 먹고 싶다고."

우리는 최고의 코미디에 맞는 이 대사에 푸하하 웃었다. P.169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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