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의 곤란함에 대하여 - 아무르 [영화]

글 입력 2022.02.27 15:19
댓글 2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설렘은 사랑의 비본질이요, 그 본질은 익숙함, 심지어는 권태로움에 있다고 믿어왔다. 상대에 대한 '지속적인 앎의 상태’가 관계를 형성, 유지, 파괴하는 본질이자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는 나의 이러한 믿음에 큰 힘을 실어주는 작품이다.

 

영화 제목이 ‘사랑(amour)’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한 단어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은 마치 선언처럼 느껴진다. 제목이 '사랑'인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애정 씬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주인공 '안느'와 '조르주'의 잔잔한 일상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나만의 결론을 얻도록 했다. 그들이 어떤 관계를 이어나갔는지, 그 관계를 떠받친 '사랑'의 유약함과 힘은 어디로부터 기인했는지, 늙음과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사랑의 형태는 어떻게 변모하는 지에 집중해보았다.

 

 

9e730c7cb2c178698dceea8a67945134a95114e9ff3bffa3d8b2270a21017dae6e7343d64d587a7fa776a12a21a6c755e14b1d9570c3548d38b28ff378aa4bfd587b5659351480144ea0fc5959c9400f6766f9b0f4d41b496d27fc6357d488e4.jpg

 

  

*

이 글은 영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선뜻 머나먼 과거를 내어줄 수 있는 용기


 

다소 이르지만, 영화의 시간과는 역행되게 결말에 대한 이야기로 물꼬를 트고 싶다. 때로는 집중력이 흐려질 만큼 잔잔한 이 영화는 노인의 서서한 죽음 외의 그 어떤 자극도 허락하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다소 이질적인 충격을 안겨 주었다. 안느를 베개로 눌러 질식시키는 조르주, 그리고 강하게 몸부림치다 점점 움직임이 멎어가는 안느의 모습은 영화 <아무르>가 그간 고수하던 서사 리듬을 깨부순다. 이 장면이 충격을 주는 이유는 이전까지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줬던 죽음은 ‘느리고도 모호한’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아내에게 확실하고도 빠른 죽음을 안겨준 조르주의 행동 동기가 정말 사랑이었을지, 어쩌면 인간적인 연민은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사랑을 가장한 연민, 연민을 가장한 사랑, 혹은 양쪽 모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랑이 이토록 어렵다. 아니, 곤란하다.

 

 

다운로드.jpg

 

 

이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나는 조르주의 행동을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젊은 날에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던 아내를 자꾸만 떠올리는 조르주에게 과거란 고향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과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전 안느는 꼿꼿함을 잃지 않았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놓아야 하는 상황의 가정에 괴로워하며 그럴 바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런 아내를 그저 달랬던 조르주였지만, 안느의 그 소망 아닌 소망이 조르주의 가슴께를 묵직히 누르는 바위로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안느의 꿈과 조르주의 꿈은 일치했다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과거로 회귀하는 것. 사랑하는 이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때문에 조르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결국 안느는 죽음으로써 태어나기도 이전의 과거로로의 회귀를 성공했고, 조르주 역시 아내와 함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랑은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를 살 수 있도록 하는 힘이 과거와 미래에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일 테다. 안느의 병세가 악화된 이후 조르주가 살았던 ‘현재에 갇혀있는 삶’은 그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추억할 과거가 괴롭고, 내다볼 미래가 두려워 현재로 망명한 인간에게 삶의 지속이란 때로는 고문과도 같다. 때문에 조르주가 안느에게 선사한 죽음은 스스로에 대한 죽음 선고이기도 했으며, 윤리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아내를 살해했다'라고 갈무리 지을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좀 더 곱씹어야 한다고 느낀다. 이는 인간 대상의 안락사 문제에 대한 논의로도 확장될 수 있을 테다.

 

조르주가 '사랑하기 때문에’ 안느를 죽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내와의 기억을, 그리고 자신의 지난 생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는 결론에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선뜻 죽음을 ―태어나기도 이전의 머나먼 과거를― 선사할 수 있는 용기’의 초상인 것이다.

 

 

 

인간이 하는 사랑은 위대하나 인간은 나약하다


 

사랑만큼 곤란한 개념이 또 있을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동시에 개만도 못한 존재로 격하시킬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점에서 지독한 모순을 느낀다. 우리의 수많은 어리석음이 사랑으로부터 기인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 만큼 우리는 사랑을 핑계로 쉽게 미래를 약속하기도, 깨어버릴 수도 있다. 형태의 부재는 곧 물증의 부재인데도 우리는 쉽게 사랑을 담보 삼아 생을 내던져야 할 계약들을 성사시킨다. 상대가 ‘날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봐.’라고 할 때, 가시적인 무언가를 꺼내 보여줄 수 있다면 그 감정이  인류의 대표적 난제로, 이토록 아득한 개념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img.jpg

 

 

하지만 우리는 흔히 사랑의 위대함을 두 눈으로 목도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랑이 가장 믿을 만한 담보가 되는 이유이다. 영화 「아무르」의 감독이 포착해 스크린에 띄우고자 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조르주가 안느를 간병하는 그 수많은 날들이 비교적 별것 아닌 일상처럼 묵묵히 그려지긴 했으나, 사실 사랑이 낳은 위대함의 예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 사랑의 위대한 속성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게만 보이는 인간은, 사랑의 주체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안느를 돌보는 조르주는 처음 아픈 아내를 아끼던 자신의 모습을 잃고 만다. 아내에게 식사를 강요하고 손찌검하는 모습은 그의 본질적인 인간성을 의심하게 되는 동시에, 모든 게 불가피한 상황에 탄식을 내지르게 한다. 폭력은 그 어느 때에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이는 오로지 조르주의 탓만은 아닐지 모른다. 인간이 인간의 사랑보다 나약한 탓일 지도.

 

나는 이들을 나약하게 만든 요인으로 ‘늙음’과 이에 따르는 ‘죽음’을 꼽고 싶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인간의 힘을 약화시키는 이 불청객은 마치 영화의 초반에서 노부부의 집에 침입했던 정체불명의 도둑처럼 사람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영화에서 구두 상으로만 등장하는 도둑이 다소 뜬금없는 설정처럼 느껴졌던 터라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제법 고심해야 했다. 결국 나의 결론은 이들의 사랑의 국면을 바꿔 놓은 죽음과 늙어감에 대한 메타포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랑을 낳는 것은 나약한 인간이다. 조르주의 헌신이 한없이 숭고해보이다가도 간간이 등장하는 그의 ‘주름 가득한 험상궂은 노인’같은 면모에 한숨을 짓게 되는 상황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인생은 길고도 아름다워?


 

안느가 아직 정신 착란을 호소하기 전, 노부부는 식탁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조르주는 사진첩을 가져다 달라는 안느의 부탁에 응하게 된다. 그가 가져온 사진을 찬찬히 넘겨보던 안느는 ‘아름다워. 인생이... 참, 긴 것 같아.’라는 감상을 내뱉는다. 그런 안느를 빤히 쳐다보는 조르주의 시선에선 알 수 없는 공백이 읽히는 듯하다.

 

 

다운로드.png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문장은 클리셰로 굳어진 공허한 표현이 되었지만 곱씹을 수록 새로운 맛이 퍼지는 말이기도 하다. 인생은 정말 아름다울까? 그렇다면 무엇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걸까. 우리가 고문 같은 삶을 버티고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인생의 아름다운 특성 때문일까? 누군가는 죽기 직전 좋은 생이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을 만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이 행복이며, 진정 생의 아름다움이라고.

 

그 국면에 가까이 닿아있는 노인으로서의 안느가 내뱉는 ‘인생이 아름답다’에는 꽤나 신빙성이 있다. 무작정 생에 대한 안느의 감상을 냉소하기 보다는, 오른쪽 몸 전체가 마비된 상황에서도 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자면, 안느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사전적 의미의 아름다움과는 조금 다름을 강조하고 싶다. 아마 ‘다채롭다’가 적확한 표현이 아닐까.

 

인간을 ‘소우주’라고 표현하기도 하듯이, 이토록 잔잔한 것이었을지라도 모두 자신만의 빅뱅과 팽창 과정을 거쳐 일궈왔을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다채롭다. 다채로움이 반드시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을 지 모르나, 아름다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다분하다. 영화에서 사진첩은 그러한 다채로운 순간들을 일축하여 보여주는 사물이다. 현재 처한 불행 역시 안느로서는 한 번도 맞닥뜨려본 적 없는 다채로움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끝도 없이 넘어가는 사진첩에 담긴 순간들은 길고도 아름답다. 인생이 아름답다는 말을 오랫동안 냉소해온 내 삶의 태도에 보기 좋게 지우개질을 하는 장면이다.

 

*

 

사실 「아무르」는 내게 상당히 어려운 영화였다. 나는 그들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에는 삶이 부족한 사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메타포를 꾸역꾸역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나의 노력은 이 영화를 온전히 감각하고 이해하고 싶은 욕구에서부터 비롯될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다소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끝낸 첫 감상 후 머릿속은 복잡한 사유들에 장악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가장 편안한 곳에 앉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시청했다. 그제서야 인생과 사랑에 대한 감독의 통찰력 있는 해석이 눈에 띄었다. 나의 부족한 사유도 점점 뼈대를 갖춰 발전되어 갔고, 결국 이렇게 한 편의 글로 형상화될 수 있었다. 마치 인생처럼, 그리고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들어온 비둘기 한 마리처럼 어려웠고, 어쩌면 어렵기 때문에 생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컬쳐리스트 태그.jpg

 

 

[오송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2
  •  
    • 전 이게 아무르, 사랑이라는 것보다 현 시대 예전처럼 대가족이 아닌 노약자들끼리 살고 있는 가정의 문제점을 꼬집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감독은 노인들만 살고 있는 가정에서는 누구나 겪는 치매와 건강 이상 문제를 다루면서, 아픈 당사자도 힘들지만, 주변에서 병간호하는 사람도 심적 신체적으로 힘듦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 사회고 요양병원에 보내서 거기서 생을 마감하는 노인분들도 많고요. 할아버지는 처음에 호기롭게 절대 안보낸다하지만 사랑보다 현실적 힘듦고ㅏ 어려움에 그런 결론을 내린것 같습니다. 막상 간호하는 당사자가 안되어보면 간호가 얼마나 힘든건지 모르거든요. 딸은 엄마를 제대로 안챙기냐며 아버지한테 머라하지만 정작 아버지가 너가 데려가서 그럼 잘 간호해봐라ㅡ 할때는 안 데려가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전 병간호는 주변 가족이 사랑만으로는 너무 힘들다는걸 감독이 강조한게 아닌가 싶어요.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오송림
    • 2023.03.30 19:49:34
    • |
    • 신고
    • 분명 한 가지 키워드나 개념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게 영화이다보니 다양한 시각이 있을 것 같아요! 사회적 문제 의식을 드러낸 부분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죠. 그래도 저는 영화의 제목과 관련해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배제하고 설명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그걸 깊이 파들어가보자 해서 하나의 집중적인 견해를 제시했을 뿐입니다! 감상자에 따라 인상적인 장면이 제각각이었을 테니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믿어요!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