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생명과 죽음의 조화 속에서 우리 삶은 지속된다 - 당신이 살았던 날들

타고난 이야기꾼, 오르빌뢰르의 이야기
글 입력 2022.03.0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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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붉은색과 적록색의 커버. 몽환적이면서도 스산하기도 하고 아름다웠다. 뒷면까지 이어진 디자인을 보려 책을 돌려보았고 김연수 작가의 추천글이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저마다 아름답다. ∙∙∙ 무용해서 아름답다. 헛되고 헛되도다, 라는 말은 결국 아름답고 아름답다, 라는 말인 셈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못하리라. 헛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것,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말할 수 없으니. 오르빌뢰르는 무엇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대해, 더 나아가 그 죽음들이 응시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준다."

 

죽음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니.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는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눈뜨게 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어떻게 저마다 아름다울 수 있는지, 오르빌뢰르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가장 많이 만나는 랍비라는 직업을 가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히 꺼내놓는다. 그리곤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했다.


 

 

아즈라엘

손안의 생명과 죽음


 

그는 랍비다.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가르친다. 성서의 텍스트를 번역해서 읽을 수 있게 해주고, 한 전통의 목소리들을 각 세대에게 들려준다. 그는 자주 묘지에서 장례를 치를 때 의례를 진행하는데, 죽음을 가까이하는 직업을 가진 그에게 생긴 의식이 있다.

 

죽음과 삶의 장소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죽음과 집 사이에 상징적인 보안문을 세워두는 것이다. 죽음이 집으로 따라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령 묘지에서 돌아올 때 곧장 집으로 가지 않는다. 카페든 상점이든 박물관이든 들러 죽음을 그곳에 남겨두고 온다. 죽음이 자신의 흔적을 놓쳐 우리 집을 아예 못 찾도록 하는 것이다.

 

유대 전통은 죽음이 당신을 따라와도 그를 돌려보낼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죽음은 수많은 전승 속에 등장하며 천사의 형상으로 우리네 집을 방문하고 우리 마을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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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장인물은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다. 한 손에 검을 쥐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주변을 서성인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별난 관습들이 생겨났다. 유대인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생기면 자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그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악의를 품고 찾아올 불청객을 속이기 위함이다.

 

죽음의 천사가 당신의 집 초인종을 누르며 모세라는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쩌나, 여기는 솔로몬의 집인데."라며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천사는 도리어 미안하게 됐다며 뒤돌아 떠날지도 모른다.

 

이 미신이 주는 관습에서 우리는 예리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죽음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방어벽이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죽음을 멀리 떼어놓기 위해 의식이나 말로 죽음을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볼 수 있다.

 

현대성과 의학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발전시켰다. 죽음의 천사는 이제 우리의 집과 거리를 두고 병원, 노인 요양원에 나타나도록 유인된다. 사람들은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 더 이상 우리 집에 볼 일이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집에서 죽는 사람의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2020년, 죽음과 집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코로나19는 사방팔방으로 우리를 방문했다. 대게 병원과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의 목숨을 노리지만, 우리 삶에 파고든 죽음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팬데믹이 도래하며 장례와 애도의 풍격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병문안을 할 때면 껴야 하는 마스크와 장갑 때문에 환자들은 우리의 얼굴과 미소를 보지 못하고, 우리가 내민 손도 잡지 못하게 되었다. 고령의 어르신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양 시설에 격리 수용한다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어코 방문할 죽음 앞에 그들을 홀로 남겨두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2020년 봉쇄 초기 단계이던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가족들은 부친의 관 앞에 서있었고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기도를 전혀 알지 못했던 그들은 멀리서나마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결국 그는 전화상으로 기도 말을 들려주었고 그들은 큰소리로 반복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거실에서, 시선도 마주친 적 없는 가족을 위해 장례를 진행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떠한 보안문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은 마침내 우리 삶의 터전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알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그곳을 떠난 적이 없으며, 그곳에 아스라엘은 여전히 서있다. 우리가 가진 힘이란 죽음이 닥친 그 순간에 할 말과 행동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조화


 

오르빌뢰르가 의과대에서 손의 생리학을 배울 때였다. 그는 자궁 내 생명의 형성 단계를 배우며 우리의 많은 신체기관들이 세포의 죽음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의 손은 완전한 종려나무 형태로 손끝에 아무 간격이 없이 발달한다. 시간이 흘러서야 서로 결합하고 있던 세포들이 파괴되면서 손가락이 개별화되고 하나씩 벌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인체는 죽음으로 조각되는 것이다. 손끝만이 아니라 심장, 체강, 창자나 신경계통도 마찬가지로 세포의 죽음으로 형성된다. 인체의 기관들은 일부가 사멸한 덕에 비로소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생명 작용의 일환인 죽음에 생명을 빚진 셈이다.

 

세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아포토시스'라고 한다. 인체에 예정되어 있는 죽음의 이름이다. 계절은 흘러 나무는 가을에 잎이 떨어져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고, 사람도 세포가 죽어야지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오늘날 암 연구에서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생명이 통제되지 않는 세포들, 죽음을 거부하고 영원한 생명력을 얻은 세포들이 종양이 된다. 생명의 과잉은 우리에게 시한부를 선고하고, 죽음의 억제는 치명적이다. 생명과 죽음이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출 때,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다.

 

죽음은 우리의 생명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죽음 덕에 생명을 지속할 수 있고,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함께 맞잡고 가야 할 존재라는 이야기는 죽음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주었다.

 

타고난 이야기꾼, 오르빌뢰르의 11가지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진실되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아트인사이트] 이소희 컬쳐리스트.jpg

 

 

[이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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