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라는 허상

글 입력 2022.02.2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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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내 집, 내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형태의 주택을 소유한다는 것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며 집에 대한 환상을 팔던 고릿적 아파트 광고는 10여년이 흐른 지금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집은 나의 부와 신분을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호패로 여겨지고, 그러한 이유에서 집은 내가 ‘사는(living) 곳’ 이라기보다 ‘사는(buying) 곳’이 되어 다양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욕망의 집합소로 변모하고 있다.


한편 집을 두고 벌어지는 피 튀기는 욕망의 각축전에 발도 못디뎌보고 소외되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청년 세대이다. 자력으로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100년 가까이 돈을 모아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청년들은 어차피 열심히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자조 속에 '남의 집'을 '내 것 같은 집'으로 느끼기 위해 집을 꾸미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성 세대가 집을 나의 부와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상징체로 여긴다면, 청년 세대는 집에 대해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매체’라는 새로운 환상을 갖기 시작했다. 어딜 틀어도 ‘먹방’ 뿐이던 TV 편성표에 연예인의 집을 보여주거나 최신의 인테리어 트렌드를 소개하고, 그에 맞게 집을 꾸미는 ‘집방’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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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청년들이 집을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로 여기며 주거 행위를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로 여기는 모습에 대해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비로소 삶의 여유를 챙길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테리어 유행의 홍수에 휩쓸려 값싸고 부실한 ‘패스트 퍼니처’를 끊임 없이 사고 버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청년들이 실은 내 집을 마련할 수도, 그 집을 꾸밀 질 좋은 가구를 공급받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현실을 되돌아본다면 이러한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집과 라이프스타일에 있어서까지 트렌드를 좇는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더없이 모순적이다. 특히나 필자는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갖을 수 없는 현실에 처한 청년 세대의 일환으로서, 스스로가 주거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의 트렌드를 이끌어갈 주체로 호명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을 자꾸만 삐딱하게 바라보게 되는 요즘이다. 결국 청년들에게 집에 대한 환상을 선사하는 오늘날 주거문화의 ‘트렌드’, 그리고 그 트렌드를 관통하는 ‘개성과 취향의 시대’라는 명제가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조장된 허구적 개념은 아닐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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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는 마치 보이지 않는 가스가 스며들듯이 우리도 모르는 새에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한 지 오래고, 그 끝에 결국 가장 사적이고 내밀하며 개인적인 공간인 집 안으로까지 스며들었다.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집과 라이프스타일, 더 나아가 가치관과 삶에 있어서의 트렌드를 좇는 건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필자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트렌디한 삶'의 경관을 한번쯤 어색하게 바라보길 권한다. 기업들이 내뿜는 트렌드라는 유해 가스 속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어쩌면 알게 모르게 그 가스에 중독되어 봐야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환기가 필요할 때다.

 

 

[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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