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하고 헤어지면서 배운 것 [드라마/예능]

글 입력 2022.02.23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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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볼 땐 그냥 내가 본 많은 것 중 하나가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다른 작품들이 쌓여도 나의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남아 내 생각, 행동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있다. 당시에 인상 깊었으면 일기에 적거나, 티켓이 많이 있거나, 문자로 누군가에게 추천하면서 흔적이 남았을 텐데 마음에 들어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깊숙이 정착한 이야기는 조용히 홀로 있는 시간에 문득 떠오를 뿐이다.


'연말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있다. 희망적이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연초에 세운 계획을 다시 살펴보며 실패에 대한 좌절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등으로 연말에 우울해지는 병증이다. 연말을 맞이하는 계절이 찬 바람이 살을 에는 겨울인 것도 온기가 필요한 우울함에 영향을 주는 듯하다. 한 해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겨울은 혼자 있는 상황에 심리적으로 취약해지는 계절이다.


그에 반해 여름은 바깥공기와 따가운 햇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느껴진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우울함을 쫓는 여름의 생명력으로 연결된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지만 외로운 '한여름'의 이야기가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름도 계절도 여름이라서 . 가슴 사무치는 상황인데 눈물이 나기에는 배경이 짙푸른 여름빛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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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여름의 추억>은 2017년 마지막 날 2부작 연속으로 방영되었다. 열심히 사랑한 여름이가 사랑하며 자라고 이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이 나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라 그런지,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나의 말 같았고, 그의 아픔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눈부시게 환한 모습으로 인사한 여름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은 건 여름 안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집 근처 중고서점에서 <한여름의 추억> 대본집을 발견하고 바로 구매한 건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드라마를 본 지 1년도 넘은 시점이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사실 2017년 마지막 날에 우연히 어떤 계획도 없이 드라마를 지나가면서 보고, 전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내 인생을 바꾼 드라마'의 영향력이 아직 나에게 없는 상태였지만, 책을 발견하는 순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당시에는 나조차 단호했던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나도 모르는 사이 한여름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의 말, 웃음, 행동은 파란 하늘 아래에서 이따금 계속 떠올랐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을 3년간 보관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곳에 꽂혀 있었지만, 우습게도 나는 그사이 이사를 두 번 가는 동안 책을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만 했다.


작년 말에 드디어 표지를 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나조차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표지를 연 순간 나를 붙잡은 문장은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죽으면 슬프다고 울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이 질문에서부터. 

그리고 그 답은 의외로 빠르게 튀어나왔습니다.


"없을지도."

그렇게 쓰게 된 것이 <한여름의 추억> 초고입니다.


- 대본집 <한여름의 추억> 작가의 말

 

 

살면서 한 번쯤 해볼 필요가 있는 질문과 현실적인 답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누군가를 계속 만나지만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 진실한 마음을 나누는 만남이었더라도, 그들 중 죽는 날까지 나를 기억하고, 보고 싶어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태어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기쁨과 축하가 넘쳐난 것처럼, 죽는 순간에도 내 주변에 사람들이 함께해 주길 바라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언제나 상황을 긍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필요한 생각이었다.

 

죽음은 모두가 경험하는 헤어짐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듯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존재함을 안다. 하지만 살아갈 때는 주로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학교에 입학하고, 취업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은 무언가의 시작만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삶에는 시작만큼 무수한 헤어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 젊고 빛났던 시절과 헤어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과 헤어짐이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한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를 인식되는 순간 세상과 소통하는 시작이 된다. 내가 아닌 사람과의 연결은 깨어지고 맺어지는 과정을 겪으며 안정적으로 형성하는 데 필요한 태도를 배운다. 가족의 사랑을 통해서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연인의 사랑을 통해서는 나의 마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한여름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속에 오래 머무른 이유는 그가 들려주는 내용이 나와 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 그리고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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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한여름의 추억>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프로그램 정보 첫 문장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있지만 드라마는 연애에 초점을 맞췄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가장 넓은 범위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연애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사랑해서 나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기쁨에 취했다가도, 상대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 때문에 지독한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한여름이 사랑한 남자 네 명은 각기 다른 이유로 여름을 사랑했고 헤어졌다. 지금은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고 있지만, 여름에게도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시절이 있다. 누구보다 솔직한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했고, 이제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아련하게 추억하는 순간들이 되었다. "난 빛나고 아팠어. 모두 네 덕분이야." 사랑한 순간이 모두 행복한 기억은 아니지만, 여름은 마지막 순간 따뜻한 인사를 건넨다.

 

젊음 | 갖고 싶어 한 적이 없는데 막상 주어졌다가, 시간이 지났다고 서서히 빼앗기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젊음이다. 특히 세월에 타격받는 표면적 젊음은 더욱 그렇다. 나는 나이가 드는 게 어릴 때부터 싫었다. 생각의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년이 올라가는 게 늘 기쁘지 않았고, 대학생이 되는 것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원치 않더라도 시간은 날 두고 가지 않았고, 즐기지도 못했는데 젊음과 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한 고등학생 이후 여름은 꾸준히 사랑했고, 점차 나이가 들었다. 스스로 예쁘고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있던 여름은 점차 자신이 초라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엄청 빛났었던 것 같은데, 단숨에 초라해졌어. 분명 사방이 빛이었던 때도 있었던 거 같은데…"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젊음을 지속하고 싶다. 이 간극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일상 | 하루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24시간 주어진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 동안 필요한 혹은 원하는 일을 하며 보낸다. 세상을 살면 매일 같은 만큼의 하루가 주어지기 때문에 일과를 만들기도 하고, 가끔은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또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할 일을 미루고 시간을 우습게 보내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늘 위 구름 사이로 스며 나온 햇살을 느끼고, 급히 준비해서 문밖을 나서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분주한 출근 준비로 보내는 아침, 뜨거운 여름 햇살에 땀을 닦는 출근길, 익숙하게 타는 방송국 로비 엘리베이터. 여름의 일상도 그렇다. 반복되고 지루하지만 삶을 지탱하는 생활이다. 내일이 불명확할 때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하루가 다시 찾아온다는 믿음은 있지만, 이전과 마찬가지의 하루가 아니라는 변수가 있다. 오늘 떠나보낸 사람 또는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상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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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은 작은 인연에서도 뭐든지 배우고 알려주는 사람이다. 실패를 나아가는 성장판으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다. <한여름의 추억>을 책으로 다시 보면서 여름의 이런 태도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헤어짐을 통해 다음 만남을 위한 자양분을 얻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실천적 행동으로 여름이 경험한 헤어짐이 간접적으로 나에게 어떤 배움을 주었는지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랑 | 혼자만의 사랑이 아니다.

드라마 중간마다 여름도, 여름과 연애했던 상대도 두 사람이 함께였던 시간을 떠올린다. 나의 말과 행동에 연인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생각하며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낀다. 싸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다시 화나기도 하고, 웃으며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며 애틋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동시에 서로를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안부조차 궁금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만 생각하는 사고와, 깊은 대화를 통해 상대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결국 이별하고 만다. 여름이 연애에서 경험한 네 번의 헤어짐은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달랐지만, 결국 공통적으로 사랑을 혼자만의 과제로 여기는 모습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내가 속상하고 화나는 상황에 상대는 어떤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젊음 | 홀로 나이 들지 않는다.

여름은 젊은 날에 희망과 가능성으로 넘치던 자신을 에워싸던 환한 빛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매일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 잘못 밖에 없는데 떠나는 젊음에 아쉬워한다. 아직 20대를 지나는 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시간이라 그런지 벌써 3년 전이 얼마 전처럼 느껴진다. 그사이 대학에는 새로운 학번들이 들어왔고,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젊음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울적하다.

 

나이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 때마다 올라가는 숫자를 막을 힘은 나에게 없다. 그러니 중요한 건 안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덜 슬플지 생각하다가 여름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특히 같은 일을 하면서 고민을 서로 나누는 해원을 보며 함께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 겪는 게 아닌 같은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이 있다면 남은 여정이 덜 외롭게 느껴진다.

 

일상 | 나의 하루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오늘도 살아서 눈뜨고 숨 쉬는 일상이 감사하다는 것을 알지만, 매일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익숙함에 묻혀 소중함을 잊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왜 하루도 쉬운 날이 없는 건지 한숨이 새어 나오는 날도 있다. 여름도 다르지 않다. 드라마 시작부터 출근할 때마다 지나는 골목을 터덕터덕 힘없이 걷는다.

 

소중한 것은 잃었을 때 비로소 가치를 깨닫는다는 말은 나처럼 준비성이 부족한 멍청이에게 잔인한 말이다. 다행히 여름은 나보다 생각이 깊다. 일상이 끝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미리 생각하고 어떻게 준비해주길 바라는지 친구에게 이야기한다. 여름 덕분에 나의 죽음이 어떤 모습일지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상과 헤어지는 날의 존재를 다시 깨닫고 나니, 눈 깜박임으로 연결되는 나의 하루가 더 선명해졌다.

 

* * *

 

사실 헤어짐은 나에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어떤 만남의 헤어짐이든 난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약속을 잡아 만난 친구와 시간이 흘러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헤어질 때, 정해진 기간만 함께 활동하기로 한 사람들과 더는 공식적인 일정이 없이 메신저로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처럼, 만남의 형태와 상관없이 헤어짐은 나에게 어렵다. 심지어 여행 마지막 날 여행지와의 헤어짐도 그렇다.

 

나도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았기에 수많은 모임, 사람, 활동과 헤어짐을 경험했지만, 유독 나만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아직 성장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인가 스스로 책망하기도 했다. 나처럼 평범하지만 나보다 씩씩한 여름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 해결될 수 있는 어려움이길 바랐다.

 

하지만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대본집으로 원작 대본을 모두 읽고 나니, 여름도 사실은 나처럼 헤어짐이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그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아픈 사실을 받아들이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지난 만남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드라마 처음 방영할 때 본 여름은 나보다 훨씬 큰 어른이었다. 이제 4년이 흘렀고 나는 여름의 나이와 가까워지고 있다. 그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면 아직 흐릿하다. 앞으로 내가 만날 사랑과 헤어짐을 여름처럼 배움의 자세로 맞이하면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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