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글 입력 2022.02.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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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밖에 모르던 나에게는 생소한 사실이었지만, 헤르만 헤세와 음악을 연결짓는 것은 문학계에서나 음악계에서나 빈번히 있어왔던 일이다.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르만 헤세 전문 편집자 폴커 미헬스가 헤세의 모든 글들 가운데 음악에 관해 쓴 글을 엮은 책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1장은 음악에 대한 헤세의 단상을 담은 에세이와 시, 짧은 소설을, 2장은 음악과 음악가를 언급한 편지나 일기, 서평 등을 담았다.

 

즉, 이 작가가 평생 음악 주변을 맴돌며 듣고 보고 느끼고 영감을 받은 모든 단상들이 차곡차곡 들어있는 책이다. (반대로 음악이 헤세 주변을 맴돈 흔적 역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부록에는 노래로 만들어진 헤세의 시들의 첫 행이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음악 번역가' 헤세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라는 제목은 내게 조금 의아했다. 음악에 '대해'가 아니라 '위에'라는 건 외국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 같은 표현일 뿐 아니라 쉽게 와닿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독일어판 책의 원제는 그저 'Musik'이다. (Hermann Hesse, Musik, Suhrkamp Verlag, 2019) 굳이 이렇게 의역한 이유가 있었을까?

 

그러나 책에 수록된 헤세의 첫 번째 에세이를 읽는 순간, '음악 위에'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헤세가 음악을 묘사하는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언급한 곡이 어떤 노래인지 몰라도, 글자들을 읽어내려가기만 해도 마치 음악을 듣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심리 상태가 된다.

 

음이 스며들고 음이 나를 붙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다 폭발하고, 그러다 다시 부슬비가 내리듯 공기를 촉촉하게 채우는 그 과정을 작가가 너무나 실감나고 아름답게 묘사하여 '아, 나도 공연장에 가고 싶다,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이 책의 1장 부분에 수록된 여러 단문들은 음악에 대한 작가의 관념을 글로 적었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글이 음악과 함께 흘러가고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감각을 자아낸다.

 

 

"...오르간 음은 점차 커지면서 어마어마한 공간을 채우더니 음 스스로가 공간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휘감는다. 음은 자라나 편안히 쉰다. 다른 음들이 합류한다. 별안간 모든 음이 다급히 도망치며 추락하고 몸을 숙여 경배하며, 문득 치솟다가 제지되어서는 조화로운 베이스 음 속에 꿈쩍 않고 머문다. 이제 음들은 침묵한다. ..."

 

- 13쪽, '고음악' 중에서

 

 

그의 섬세한 묘사는 음악 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공연을 보러 나서는 길, 연주가 열리는 큰 홀 혹은 마을의 작은 성당, 함께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말소리까지 헤세는 그가 사랑하는 음악을 다루듯 소중한 언어로 담아낸다. 음악 그 자체 뿐 아니라 음악으로 향하는 것들까지 조화롭게 가꾸어진 그의 글을 읽으면,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음악이라는 하나의 완성된 경험임을 깨닫게 된다.

 

그의 에세이, 시, 단편 소설을 읽으며 헤세에게 '음악 번역가'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번역은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최대한) 온전히 옮겨내는 것은 창조적인 재능과 노력이 수반된다. 하물며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번역해내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음악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어떤 에너지, 헤세의 말에 따르면, "열 세대가 지어 올려야 했던" "긴 시간에 걸친 노동과 결실"(18쪽)의 에너지를 추상적인 활자에서 느끼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미술과 활자 사이의 충실하고도 창조적인 번역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헤르만 헤세를 더욱 동경하게 되었다.

 

 

 

예술을 사랑한다면, 헤세처럼


  

이 책을 읽는다면 헤세가 어떤 음악가와 음악을 좋아하는지, 또 좋아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리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참 좋았다. 그는 음악사의 모든 주요한 거장들의 음악에 두루뭉실하게 의미부여를 하거나 해석하려 들지 않고 자신의 음악적 선호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쾌히 설명하고자 했다.

 

 

"제가 만일 감사와 사랑을 담은 이 편지를 정말로 보낸다면 당신은 지당하게도 이렇게 답하시겠지요. 당신은 저 같은 문외한이 음악적 자질을 논하고 판단을 내리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요. ... 저는 그저 무언가를 명쾌하게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제 음악적 취향과 판단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요. 저는 예술에 대해 말하고 사유할 때 예술가의 시선을 고수하지만, 예술비평가나 미학자가 아니라 모럴리스트로서 바라봅니다. 나 자신이 예술의 영역에서 무엇을 거부해야 하고 불신해야 하는지, 무엇을 숭배하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겁니다."

 

- 138-139쪽. '어느 여자 성악가에게 쓴 부치지 않은 편지' 중에서

 

 

그가 자신을 '문외한'이자 '모럴리스트'라 칭하는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음악을 듣고 느낄 때 미학적 지식이나 기준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양심'을 따른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영화든 와인이든 무언가를 진하게 좋아해본 경험이 있다면 공감할 것이다. 좋아함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남에게 꺼내보이는 데에도 처음보다 더 용기가 필요해진다. 자신의 판단에 가해질 타인의 판단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헤세는 말러보다 모차르트를 선호했다.

 

그는 특히 예술에서의 '집단주의'를 경계했는데, 대중을 감정적으로 고양시키고 도취시켜 열광하게 만드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 삶을 긍정하는 경쾌한 선율과 보편적인 균형과 조화가 남기는 오랜 여운을 더 사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헤세는 새로운 음악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의 기준은 책 전체에서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번민의 능력과 강건함이 함께하고" "한없이 순진한 기쁨을 이해하는 능력이 정신적인 것을 이해하는 능력과 짝을 이루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품성이 고도로 분화되어 있는"(87쪽) 그런 대립의 공존을 헤세는 사랑했고 그의 글을 읽는 나도 내가 그런 것들을 선호하고 있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예술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표현해보고, 보다 성실하게 글로 옮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충만해지고, 마음이 몰랑해지고, 진한 여운이 남을 때 그 좋은 느낌을 그대로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다시 글로 정리하면서 몇 번을 곱씹고 한껏 음미한 후에 삼키고 싶어졌다.

 

 

 

다시 읽고 싶은 책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특히 예술가의 집념만큼이나, 편집자의 재능과 노고에 감탄했던 책이었다. 여러 종류의 글을 설득력 있게 연결하여 작가의 철학에 스며들듯 납득하게 해주어 좋았다. 예를 들면 비르투오소에 대해 쓴 에세이가 있으면, 바로 다음 장에 그에 대한 작가의 또 다른 시를 연결해서 싣는 방식이 돋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헤세의 깊은 조예를 조금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다시 읽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도 자신을 '문외한'이라 했지만...

 

덕분에 모차르트를 한동안 들었다. "한없이 유쾌한 천진난만함에서 한없이 깊은 진지함까지" (226쪽) 아우르는 대가의 음악을 새로운 귀로 듣고 느껴봤다. 더불어 그의 <데미안>을 다시 읽고 싶고, 언젠가 <유리알 유희>를 읽어보고 싶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이것저것 '보충학습'을 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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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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