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설극장] 좋은 연극이 되지 못한 구차한 변명

글 입력 2022.02.1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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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편의 문학 작품이라 생각했다. 삶의 모든 일에는 복선이 존재한다. 어떤 맥락을 안고 갈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다만 내 인생은 내가 해석하고 싶었다. 복선을 발견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었다. 삶은 무수히 많은 기승전결의 집합체라 생각했고, 그 역시 내가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잘 짜인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맥락이 매끄럽고, 서사가 감동적이며, 기분 좋은 반전이 있다면,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믿었다. 삶도 그렇게 정확한 계획과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잘 짜인 문학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그래서 더 맥락에 집착했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복선을 찾았다.


나는 잘 짜인 이야기를 가졌다. 경험자산에 값을 매길 수 있다면 적어도 중산층 이상은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내 인생도 좋은 이야기가 될 거란 환상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삶은 무궁무진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내가 망각한 것은, 인생은 소설이 아닌 희곡이라는 점이었다. 삶은 상상 속이 아닌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좋은 희곡이 좋은 연극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인생에 필요한 것은 해석뿐 아닌 연출이었다. 희곡을 어떻게 무대 위로 올릴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어야 했다. 무대는 위험하다.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대사를 잊을 수도, 동선이 꼬일 수도, 극장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나는 이 가능성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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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에 온 지 6개월이 되었다. 잘 짜인 대본을 들고 도착한 뉴욕에서, 나는 구석에 앉아 또다시 복선을 찾았다.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있단 사실에 안주한 채 공연장 정비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작년 11월 나는 결국 큰 번아웃과 함께 자체 인터미션에 들어섰다. 여전히 나의 희곡은 완벽하다. 하고 싶던 공부를 하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고, 맥락을 기반으로 탄탄한 계획들도 쌓았다. 나날이 이력서에 글자 수는 느는데, 뭔가 이상하다. 여전히 좋은 연극이 되지 못하는 기분이다.


해야 할 것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는데 손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좋은 희곡과 황량한 무대 사이의 괴리는 꽤 큰 공허로 다가왔다. 마음만 앞서는 건지 마음이 못 따라오는 건지 종일 희곡의 문장 부호 사이를 따라 뱅뱅 돌았다. 복선이 되지 못한 단어들만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

 

졸업을 100일 앞두고 나는 희곡을 덮었다. 인터미션 선언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무대와 걸음걸음 쫓아오는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잘 짜인 희곡에 대한 집착이 완벽한 연극에 대한 강박을 낳았던 것이다.


계획이 완벽하면 당연히 해낼 수 있다고, 그래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날 다그쳤다. 이렇게 훌륭한 대본이 있는데 별다른 과정 없이 완벽한 연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걸음걸이 하나조차 대본과 달라서는 안 된다고, 그건 자칫 희곡의 서사를 해칠 수 있다고, 그 생각에 잔뜩 긴장한 채 살아갔다. 매 순간 나는 연출가 없이 평론가 앞에서 연극을 해야 했다.


공연을 사랑한다던 나는 정작 내 공연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애드리브가 좋아 다회 관람을 서슴치 않던 나는 애드리브을 뱉지 못해 막을 내리고 숨어버리기까지 했다. 배우가 완전히 그 인물이 되어야 좋은 공연이 가능하다던 나는 정작 나조차 되지 못했다.


완벽한 대본이 완벽한 연극을 보장하지 않는단 것을 어쩌면 알았는지도 모른다. 놓을 수 없어서 손에 꼭 쥔 채, 이대로만 하면 된다고 중얼댄 것뿐이다. 아쉽게도 삶엔 너무 많은 반전이 있었고, 그걸 감당하기엔 내가 너무 많이 긴장한 상태였다. 중도퇴장하는 관객, 음향 사고, 그리고 대사 실수. 전부 나의 목을 조여왔다.


어떤 사람들은 대본 없이 큐시트 하나만으로도 잘만 살아가던데, 나는 도무지 놓아지지가 않는다. 나를 증명해줄 소품들이 필요하고, 반전을 예측할 복선들이 필요하다. 긴장하지 않고 무대에 서는 법은 언제쯤 알게 될까? 언제쯤 나는 자유로이 애드리브를 날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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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무대를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잠시 극장의 모든 시스템을 내렸다. 겨울방학 내내 혼자 미국 서부로 여행을 다녀왔다. 나를 긴장시키는 것들로부터 달아나 나 자신이 되는 것부터 연습했다. 희곡에 없는 이야기를 마주하며 대본을 손에서 놓는 연습을 했다. 여행 내내 에드리브를 연습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나의 극장은 보수 공사 중이다. 인터미션이란 명명에 무색하게 다시 막을 올릴 준비가 망설여진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내가 내가 되어 객석을 마주하고 싶은데 아직은 몸이 먼저 굳는다.


그래도 일단 해보려 한다. 언제까지고 커튼 뒤에 숨은 채 희곡에 밑줄만 칠 수는 없다. 완벽한 공연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대본에 대한 맹신을 버려야 한다. 좋은 연극은 대본뿐 아닌 좋은 연출이 밑바탕 되어야 하며, 좋은 배우는 무대를 사랑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부터 하나씩 잡아봐야겠다.


다시 막을 올렸을 때 관객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무대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주해봐야겠다. 나는 잘 짜인 이야기를 가졌으니까. 그게 좋은 공연을 보장해주진 않겠지만, 좋은 공연의 자본이 됨은 확실하다. 나머지는 무대 위에서 생각하기. 삶은 그제야 공연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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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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