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딸에 대하여 -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도서]

글 입력 2022.02.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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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엔 꼭 아들로 태어나고 싶었다. 요즘에는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는 말이 싫었다. ‘딸’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단순히 여성이라는 성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모의 말에 순종적이고 집안일을 시키지 않아도 하는, 부모에게 예쁨 받을 짓만 골라 하며 결혼해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잊지 않는 딸에 한해서만 딸이 아들보다 더 낫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여성은 완전무결한 ‘성녀’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딸’이기에는 실패한 사람이다.

 

 

 

딸에 대하여


 

 

“나는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원한다. 양손으로 삶을 꽉 붙잡고서 쥐어짜고 비틀어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고 싶다. 아무리 해도 부족할 거다.”

 

 

훌리아는 2녀 중 차녀지만, 언니 올가의 죽음으로 홀로 남는다. 훌리아와 올가는 자매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올가는 수수한 차림으로 전혀 꾸밀 줄도 모르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그러나 훌리아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에게 반박할 줄 알며 특히 성차별을 겪을 때면 누구보다 분노하는 여성이다.

 

추수감사절에 여성만 노동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여성은 남성에 순종해야 한다는 가톨릭교회에 반박하고, 요리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훌리아는 ‘여자아이’같지 않다. 그는 부모님이 고분고분한 올가를 더 아낀다고 느낀다.

 

전통적인 여성성을 따르는 올가와, 이에 완강히 저항하는 훌리아는 자매이면서도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훌리아는 언니를 잃고 나서야 언니의 흔적을 천천히 더듬는다.

 

이 소설의 묘미는 훌리아가 자신은 남들과는 다르다고 부정하면서도 사실 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역시 언니를 ‘성녀화’하여 언니 방의 물건이 자신의 상상과 맞지 않을 때 ‘언니가 그럴 리가 없다’라고 부정하거나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언니의 친구에게 추궁하는 등 집요하게 군다. 또한 훌리아는 언니에게 가려졌을 뿐이지 주변 친구들에게 은근히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 배경에는 그의 부모님의 비중이 크다. 이 소설에서 가장 괴로운 부분 중에 하나로, 그의 어머니는 강제로 외출금지를 강요하고 허락 없이 딸의 일기장을 훔쳐본다. 어머니가 짐을 마음대로 뒤지고 딸에게 상처를 주는 동안 아버지는 철저히 방관한다. 간섭이 없다는 건 오히려 훌리아를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결국 자해로 병원에 가서도 말이다.(훌리아의 자해는 가해자를 대신해 피해자가 직접 본인을 상처 입힌 행위로 보인다.)

 

훌리아가 언니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결국 올가 또한 그들이 상상한 성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부모가 원한 ‘완벽한 멕시코 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훌리아와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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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훌리아를 ‘줄리아’로 발음한다. 이민자들은 종종 자신의 이름이 사라진다. ‘정’이 ‘융’이 되기도 하고, ‘페드로’는 ‘피터’가 되기도 한다. 발음을 교정해 주려고 한들 이민을 ‘받아주는’ 국가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훌리아의 삶 역시 다른 이민자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겪는 부조리를 참아야 한다. 또한, 그 역시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완전한 ‘멕시코’인도 아니다. 그는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어느 집단에서도 완벽히 소속되지 않는다.

 

 

“1991년에 우리 부모님은 결혼을 하고 더 나은 삶을 찾아서 고향인 치우아우아 로스 오호스를 떠났다. 그해 말에 언니 올가가 태어났다. 두 사람이 원한 것은 아메리칸드림뿐이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아마는 남의 집 청소를 하고, 알파는 캔디 공장에서 일한다.”

 

 

새로운 삶을 위해 이민을 선택했지만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훌리아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부모님과 같이 사는 완벽한 멕시코 딸의 역할을 부정하고, 훌리아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마치 주문처럼 자주 본인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본인의 꿈에 집중하고 싶었다.대학교에 가고 싶은 욕심도, 특히나 집에서 먼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이유도 역시 딸의 역할과 이민자로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욕망이 훌리아에게는 욕심이 된다.

 

작품이 마지막을 향할수록 점점 올가의 죽음에 집중하기보다 훌리아의 삶 전체에 집중하게 된다. 언니의 부재에서 대학 진학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훌리아 개인의 성장 소설이다. 그는 우울증에 맞서고 집에서 먼 뉴욕으로 대학 진학을 성공한다. 우울증과 죄책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지만 훌리아의 삶은 복잡하면서도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준다. 완벽한 딸의 역할은 애초에 없다. 누군가의 딸이자, 소수자인 그는 어찌 되었든 앞으로도 살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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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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