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설 연휴 동안 내가 마주한 것들 [사람]

짧은 잡념
글 입력 2022.02.03 14:46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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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뵌 할머니는 푸짐한 밥상을 차려 주셨다. 왜 이렇게 말랐냐는 말과 함께 갈비가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가까이 밀어주셨다. 어떤 말을 해도 할머니 눈엔 언제나 야위어 보일 것을 잘 알기에, 너무 잘 먹고 다녀서 큰일이라는 말은 야무지게 뜬 밥 한술과 함께 삼켜냈다. 맛이 배부름을 이겨 기어코 마지막까지 싹싹 비워내곤 소화시킬 겸 걷자는 엄마와 배를 통통 치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살갗으로 파고드는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안 그래도 끝까지 채워 잠근 코트를 빈틈없이 더 여몄다. 바다는 밤에 보면 더 아름다운데, 그만큼 코 끝이 차가워지는 칼바람은 덤이다. 연신 춥다고 호들갑을 떨며 내 주머니 대신 엄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맞잡은 엄마의 손은 손난로보다 따뜻했다.


광안리 바닷가에 올 때면 묻어둔 타임캡슐처럼 꺼내보는 추억이 있다. 바닷가 주변은 참 많이 변했는데, 바다는 여전히 나의 그 시절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엄마와 포갠 손을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추억의 발자취를 쫓았다.

 

 

 

열아홉


  

대학교 입시를 코앞에 둔 나는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함께 입시를 준비하던 친구 두 명과 광안리 바닷가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인 커피와 음료를 사 들고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은 시간까지 반짝이는 술집과 24시 카페 간판 불빛을 등진 채 새까만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물결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를 집어삼킬 듯 철썩거리던 파도 소리만은 명확하게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우리는 각자의 고민을 파도에 실어 떠나보내는 의식을 행하느라 말이 없었다. 가장 말이 없을 때 마음은 가장 시끄러울 것이라는 걸 잘 알던 우리는 서로의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떠들썩하던 파도 소리만이 고요한 우리를 달래 주었다.

 

서울에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이십 대가 된 후로 함께 바다를 보러 오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각자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바다 사진을 찍어 단체 채팅방에 올리곤 한다. 서로를 떠올린다는 증거이다. 나 또한 광안리 바다를 거닐며 그때의 우리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한참을 바다 앞에서 시간을 보낸 후, 별거 아니었다는 표정으로 엉덩이에 붙은 모래알을 툭툭 털어내곤 금세 특유의 천진함을 되찾던 열아홉 살 아이들이 모래사장에 쪼르르 앉아있는 것 같아서 짧게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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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나


 

2년 만에 R을 만났다. 내 친구 R로 말할 것 같으면, 열아홉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부산에 내려올 때나 가끔 만날 수 있는, 그러니까 '우리는 자주 멀리 있지만 항상 가까이서 너를 응원한다'라는 말로 생일 편지를 마무리하는 친구이다.

 

각자의 시간을 쪼개어 2년 만에 만난 R과의 만남은 여전히 친근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 것으로 안부 인사를 대신하고는 커피로 갈증을 달랜 후 술을 마시러 갔다. 부산이 이렇게 추울 줄 몰랐다며 목도리를 조여 매는 내게 따뜻한 걱정 대신 특유의 사투리로 '서울 날씨 별거 없네~'로 맞받아치는 R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그간 전하지 못했던 근황을 나눴다.

 

희로애락이 담긴 서로의 이야기, 머물다 간 인연들, 우리는 서로에게 부재하던 시간 동안 마주한 각자의 일들을 이야기했고 눈을 맞추며 들어주었다. 그녀와 눈을 맞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웃고 울고 미래를 고민하던 십 대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가 봐온 R은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R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R은 좋은 순간이 더 많아서 여전히 사랑해를 남발하곤 한다. 어쩌면 ‘사랑’의 위대함을 믿는 나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R에게 장난스레 사랑한다고 맞받아쳤다. 약간의 술기운이 섞인 고백일지라도, 우리는 늘 표현에 솔직한 서로를 좋아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R과 헤어질 때 즈음, 편지를 건넸다.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썼던 그리 길지 않은 편지다. 너는 언제나 멋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잔뜩 적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몇 마디 짧은 문장으로 다 담기에는 너무 넓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너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언제나 네 곁에 머무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헤어짐의 인사를 나눴다. 각자 자리에서 또 열심히 살다 만나자는 인사와, 조심히 올라가라는 그녀의 염려는 아쉬움으로 가득했던 발걸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누군가의 최선이 아니었을까


 

[크기변환]KakaoTalk_20220202_193420050.jpg

 
 
가로등에 걸려있는 연을 보니 설 연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하필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가로등이라 거센 바닷바람에 연의 끝자락이 마구 펄럭이고 있었다. 연의 주인은 분명 어린아이였을 것이라 예상한 나는 한 꼬마 아이를 머릿속에서 멋대로 상상했다.
 
아이는 한껏 들뜬 얼굴로 연을 날리고 있다. 그러다 바닷바람에 방향성을 잃은 연이 가로등에 걸려버린다. 아이는 가로등에 묶인 채 나부끼는 연을 절망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가로등의 높이를 실감하고 진작 포기하고 돌아서는 아이의 모습까지 그려내다가, 문득 아차 싶었다. 어린아이라면 연을 빼내기 위해 끝까지 애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마음대로 가늠하고 시도를 포기하는 행위는 아이의 시선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온갖 힘을 다해 엉켜버린 실을 풀고 연을 내리려는 아이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수정한다.
 
어찌 되었든, 가로등에 묶인 채 남아있는 연을 보니 그것을 내리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 연은 아이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갈망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연을 뒤로한 채 돌아섰을까. ‘놓을 줄도 알아야지’ 그런 식의 어른들의 합리화는 어린아이에게 타당한 위로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가로등에 홀로 걸려 있는 연이 누군가가 쉽게 포기하고 버린 흔적이 아닌, 안간힘을 쓰다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린 갈망의 잔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한참 동안 연을 올려다보았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나는 자꾸만 눈이 시렸다.

 

 

 

최유정.jpg

 

 

[최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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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  
  • 밤바다
    •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시끄러울 때 광안리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저를 많이 위로해줬는데.. 그 때 파도소리가 생각나네요 사진을 보니 광안리로 떠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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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아
    • 진짜 글이 너무 몽글몽글해요..
    • 1 0
  •  
  • 아이
    • 작가님 의 따뜻한 글들이 마음을 울리네요.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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