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글 입력 2022.02.0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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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난 영혼은 출생의 신비를 잊고 삶을 견딘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터널을 지나서, 앞을 볼 수 있는 작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성장’이다. 성장통을 견딘 아이는 어김없이 인생의 갈림길을 마주하고, 한쪽으로의 선택을 강요당한다. 조용히 분투했던 일상은 어느새 인생의 단편이 된다.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를 저술한 작가 술라이커 저우아드 또한 여느 청춘들과 다름없이 일생의 조각을 모으는 중이었다. 화가 어머니와 교수 아버지가 이룬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다니면서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고 사랑하며 꿈에 닿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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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아드는 세상을 더 알기 위해 유학을 떠났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자 인턴 생활을 하면서 대학생이라면 응당 치러야 할 것만 같은 과제들을 척척 해냈다. 에세이에는 이러한 일화들이 시간순으로 담겨 있는데, 저우아드가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문체가 상당히 담백하고 현실적이라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부끄러울 법한 일을 숨기지 않고, 속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진실한 글이 주는 매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마치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와 마음을 담은 편지를 건네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려움이 몸을 타고 흘렀을 때, 유난 떨고 싶지 않아 화장수를 치덕치덕 바르며 고통을 참았던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핏자국이 눌어붙은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인과 성관계를 할 때 불을 끄려 했던 것이나, 검정 스타킹으로 어떻게든 상처를 가리려 했던 마음은 꽤 적나라하지만, 독자에게 인간적인 공감의 기회를 제공한다.

 

저우아드는 외면 혹은 보류라는 선택으로 고통을 숨기려 했지만, 병의 원인조차 모른 채 일상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를 에이즈(HIV) 환자로 의심했고,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고민을 터놓고 대화했던 어머니마저 이번에는 그의 진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저우아드는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스물 두 살에 암 진단을 받으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쓰러져서 흐느껴야 하나?

기절하거나 비명을 질러야 할까?

 

- 72p.

 

 

그는 자신의 몸에 혈액과 골수를 공격하는 악성 종양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통보받는다. 어머니는 작업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버지는 숲으로 산책을 나간다. 대학 시절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제이크는 투병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외면하듯이 끊어버리고, 저우아드의 몸에 침투한 병의 존재는 마을의 화젯거리가 되어 이웃들의 관심사로 급부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나의 숨결이 끊어질 수 있다는 것, 이보다 잔인하게 인간의 삶을 꿰뚫는 균열이 있을까.

 


술라이커 저우아드.jpg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저우아드의 남자친구 윌은 그의 전화를 받자마자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겠다고 말한다. 저우아드의 집에 도착한 윌은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에 좌절하기도 잠시, 애인을 위로해주며 곁에 있을 것을 선언한다.

 

남자친구가 집에 묵으러 왔지만, 부모님은 서재에 따로 잠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모두의 체면 따위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병명을 알게 된 지 마흔여덟 시간 뒤, 나는 침실 창문 커튼 너머로 차 한 대가 멈춰 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윌이 도착했다. (중략) 내가 유년기를 보낸 침실에서, 분홍빛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포스터를 배경으로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옆방에 있는 부모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섹스가 끝나자 윌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아주 많을 거야.” 그가 말했다. “우리 사랑을 상자에 넣어 소중히 간직해야 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라도 이 관계를 지켜야 해.”

 

- 80p.

 

 

시련을 극복할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은 자신을 지탱하는 또 다른 인간을 통해 자못 거대한 진리를 마주한다. 사랑이 모든 것의 회복제가 될 수는 없어도, 잃어버린 힘을 찾는 최대한의 도움이 된다는 진리 말이다. 그렇기에 암이라는 비일상적 슬픔과 공존하면서도 희망을 향한 발걸음을 기꺼이 옮길 수 있음을, 저우아드는 자신의 삶으로 이를 증명했다.

 

생존률 35%의 백혈병을 치료하려 도착한 곳은 암 병동이었다. 저우아드는 여린 몸을 수놓는 링거 줄과 화학요법을 견디며 삶의 불합리함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힘겨운 나날을 정지된 시간처럼 느꼈으며, 윌이 없을 때면 자기연민에 빠져들어 다른 이의 젊음에 자신을 대입하여 비교했다. 그는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임상실험을 받았고, 옆에서 죽어 나가는 환자들을 지켜보며 비관에 빠졌다.

 

저우아드가 그 시간 가운데에서 발견한 것은 글쓰기의 보람이었다. 종일을 침대에 앉아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보내던 그는, 투병 전까지만 해도 다채로운 활동에 누구보다 야심 차게 앞장섰던 경험을 되새긴다. 그러면서 힘들 때마다 의지해왔던 취미인 ‘일기 쓰기’를 재개한다.

 

 

100일 동안은 아무리 몸이 아프거나 피곤해도 날마다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딱 한 문장만이라도.

 

- 146p.

 

 

생존에 대한 집념은 창작을 향한 열망이 되었고, 저우아드는 2012년 초에 블로그를 개설하여 미약한 기력으로나마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블로그는 세상에 그의 목소리가 퍼질 수 있도록 도왔고, 글은 그와 바깥 세상을 잇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 저우아드는 자신의 투병 소식을 접한 미국 전역의 독자로부터 답장을 받았고, 심지어는 뉴욕 타임즈를 통해 칼럼을 기고할 기회를 얻는다.


 

나는 전화를 끊고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나 일자리를 구한 것 같아요.”

 

- 162p.

   

 

투병 생활은 1,500일. 그의 곁을 지킨 사람들과, 조금 일찍 곁을 떠난 사람들의 기록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의 원제인 ‘Between Two Kingdoms(두 개의 왕국 사이에서)’는 수전 손택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따온 말이다. 손택은 이 책에서 “인간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이중국적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좋은 여권만을 사용하길 바라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잠시나마 다른 쪽 왕국의 시민이 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질병과 건강을 오가며 육체의 고난과 싸우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손택이 말했듯이 우리는 두 개의 왕국 사이에서 인생의 풍파를 견뎌야만 한다. 그 결말이 어느 왕국에서 마무리되든, 우리에게는 제각기 다른 삶의 운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햇수로 4년간의 투병 생활을 견딘 후에, 저우아드는 완치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일상에 남은 것은 죽음의 천사가 남기고 간 흔적뿐이었다. 그는 후유증을 동반한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를 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간 무너졌던 삶의 조각을 다시 모아 쌓기 위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우아드는 자신의 투병 기록을 녹여내었던 글을 읽고 편지를 보냈던 독자들을 떠올렸다. 불치병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노교수, 자살한 아들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 청소년기부터 암 투병을 견딘 십 대 소녀,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형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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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아드는 이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로 한다. 이들과 만남으로써 부서진 마음을 이어붙이고, 잃어버렸던 삶을 재건하기 위해 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24,140 킬로미터의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몰랐던 희망과 깨달음의 순간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이별이든 혹은 죽음처럼 크고 막막한 것이든, 상처와 배신은 결국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상심을 회피하다 보면 나를 아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목적도 상실하게 된다. 나는 사막을 바라보며 내게 한 가지를 약속한다. ‘언제든 사랑이 찾아오는 걸 깨달을 만큼 깨어 있기, 그리고 그 감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른다 해도 끝까지 가볼 만큼 용감하기.’

 

- 404p.

   

 

이 책에는 고난을 해결하고 기적과 같은 찬란한 미래를 마주하는 성공신화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곳에 실제로 미치지 못하고, 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담대한 사람이야말로 부서진 삶에 완전함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흩어진 마음의 파편을 한데로 모아 기꺼이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술라이커 저우아드는 지금도 두 개의 왕국 사이의 경계에 놓여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과 주제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일을 이어나가고 있다.

 

확실하지 않은 존재도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삶을 관통했던 역설적인 진리가 아닐까. 그의 글을 통해 가끔 엉망인 것처럼 느껴지는 내 인생 또한 완전한 축제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본다.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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