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자는 어떻게 생각을 발전시키는가 [문화 전반]

생각을 만드는 글자
글 입력 2022.01.2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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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뜬금없는 생각은 공부를 하게 만드는 힘과 원리는 무엇일까,라는 구체적인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흔히 ‘공부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 온 지적 유산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지적 유산’을 대물림하게 하는 수단은 음악, 미술, 조형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인간의 깊은 내면을 비교적 명징하게,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건 바로 문자다.

 

문자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다는 기원이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에 크게 네 가지로 그 기원을 추정한다. 첫째 부류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유래한 문자다.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과 그 유사한 문자는 다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온 것으로 본다. 두 번째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류가 있다. 세 번째는 중국 갑골문자에서 유래된 문자인데 한자문화권이 여기 속한다고 보면 된다. 마지막은 한글처럼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만든 문자다. 앞의 상형문자 계열이나 갑골문자와 달리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다는 게 밝혀진 문자인데 전 세계에서 한글이 유일하다.


좀 다른 얘기지만, ‘세계 문자올림픽’이라는 게 있다. 가장 쓰기 쉽고 배우기 쉬우며 풍부하고 다양한 소리를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가리기 위한 대회다. ‘세계문자학회’는 작년 10월 1일부터 4일 동안 태국 방콕에서 ‘제 2회 세계 문자올림픽’를 개최했다. 한글을 비롯해 영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뱅갈리어, 구자라트어 등 세계 27개국 문자가 경합을 벌였다. 각국 학자들은 문자의 기원, 문자의 구조와 유형, 글자 수, 결합능력, 독립성과 독자성, 실용성, 응용 개발성 등을 주제로 자국 고유문자를 설명했다. 16개국이 경쟁한 지난 2009년 1회 대회에 이어 또다시 한글이 1위를 차지하며 그 우수성을 입증했다. 2위는 인도의 텔구루 문자, 영어 알파벳이 그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했다.

 

과학성과 표현성 합리성 실용성 등 타 문자에 비해 한글의 장점은 모든 면에서 입증된다. 단적인 예로 5초만에 입력 가능한 한글 문장을 중국어나 일본어로 입력하려면 평균 35초가 걸린다. 디지털 시대에서 가장 적합한 문자라는 방증이다.

 

어쨌든 문자는 논리와 체계를 갖추면서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됐고 그 그릇을 이용해 시간을 넘어, 공간을 지나 인류는 지적 유산을 기록하고 남기고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시공간을 넘어선 인류의 다양한 유산들을 경험하고 싶을 때 나는 전시회를 찾는다.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인류의 문화유산’은 새로운 사고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은 도저히 멈출 수 없을 때도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 생각이 안 나기도 한다. 우리는 어쩌다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었을까?


내가 내린 결론 중 하나가 문자의 보급이다. 책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 보자. 누군가 대중들을 한데 모아 놓고 책을 읽어줬을 것이다. 성경이 대표적이다. 교황이 성서를 읽어주고 설교를 한다. 그 내용에는 교황 개인의 해석과 신념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인쇄술이 발달한다. 누구나 개인적으로 책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읽는다는 것은 내용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황이나 교회의 가치관이 끼어들 수 없다. 더불어 각자 책을 읽는 과정은 책과 자신에 대해 깊게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자신만의 속도로 내용을 소화하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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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환상>, 캔버스에 유채, 553 x 3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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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 <설교하는 루터>, 캔버스에 유채, 1547년

 

 

위 두 그림은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루벤스가 그린 그림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인쇄술의 혁신자인 구텐베르크의 영향을 받기 전에 그려졌다. 단상 위에 올라 있는 남자는 팔을 뻗어 힘차게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대중들은 설교자를 통해 신을 배운다. 모두가 내 말에 집중하는 것은 꽤나 짜릿한데, 그런 느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림 속 남자가 시대를 타고난 행운아처럼 느껴진다.

 

반면 구텐베르크 이후 그려진 두 번째 그림 속 대중들은 설교하는 루터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루터와 대중의 시선은 모두 예수를 향한다. 신과 인간의 중재자를 바라보던 시대에서 신(믿음)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이제는 각자의 신념과 믿음에 따라 신과 만날 수 있게 됐다.


결국 생각이라는 것은 혼자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조건에서 온다. 그 조건 중 하나가 ‘문자(글)’이다. 다양한 상상 속에 빠져 있다가도 다시 돌아오면 문장들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얼마나 오래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야말로 글을 읽는 행위는 내가 마음껏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글자를 하나하나 천천히 톺아보면 분명 알던 내용도 다시 보이게 될 때가 있다.

 

그동안 작품 옆 수많은 캡션들을 읽으며 설명은 상상을 제한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경우를 마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을 천천히 향유하는 과정은 양질의 생각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며 대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준다. 내가 읽는 글이 나를 형성한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상대가 알고 싶을 때면 “인생 책이 뭐예요?”라고 묻곤 한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공부는 과연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 온 지적 유산을 ‘문자(글)’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습득하는 게 다일까? 한발 더 나아가 물려 받은 지적 유산을 토대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진짜 공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난 주 토요일 (1월 15일) 작고 6주년을 맞은 신영복 선생은 문자(글)을 읽는 것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모든 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엔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三讀)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脫文脈)이어야 진정한 공부를 이룰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독(多讀)과 삼독(三讀)을 강조했다. ‘다독’은 많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번 읽는 것, 그리고 ‘삼독’은 텍스트를 넘어 자신을 읽고 마침내 문맥을 벗어나 실천에 이르는 것까지 이뤄야 공부의 완성에 다다를 수 있다고.

 

이제 인쇄술은 디지털을 입고 복제와 확장에 대해서는 역사 이래 이처럼 발전한 적이 없다. 이제는 곁에 두고 꾸준히 읽을 문자(글)은 무엇인지, 또 깊이 생각(사유)하게 만드는 좋은 글을 어떻게 써야할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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