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글 입력 2022.01.1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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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은 시간은 단 한 달, 그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만일 나에게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선 해야'만' 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고... 어디 멀리 여행을 가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하루가 얼마 없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은 하루가 얼마 없기에, 평범한 일상을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실은 결코 평범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없을 테니까.

 

에나 유키. 고등학생인 그는 스스로를 학교의 카스트 계급 하류층에 속해 있다 말한다. 상류층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지만, 에나는 크게 마음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도 때로는 일렁이곤 한다. 그의 마음에 파도를 일으키는 사람은 학교의 카스트 계급 상류층 여학생 후지모리이다. 에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후지모리를 짝사랑해오고 있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생각은 없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니까.

 

그런 그에게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니지, 한 달이라는 시간'만' 남아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딱 한 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성을 잃었고 세계는 마비가 되었다. 에나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온 것 같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후지모리가 지금 그의 옆에 서있으니 말이다. 

 

에나 유키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깡패 메지카라 신지에게도 미혼모, 거식증에 걸린 인기 가수에게도 단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인생의 교집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들에게 지구 멸망이라는 공통분모가 생긴 것이다.

 

어딜 봐도 이들의 삶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망한' 삶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구 멸망을 통보받은 이후,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비로소 살아남기를 꿈꾸기 시작하는 그들의 행보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

 

에나는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보다 나는 내가 훨씬 좋아졌어'라고 말한다. '언제나 어렴풋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그가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에나는 지구 멸망이라는 지상 최대의 이벤트가 주어지고서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짝사랑하는 후지모리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누가 보면 별것 아닌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또렷하게 들여다본, 첫 응시였기 때문이다.

 

흔히 말한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고. 에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첫 발을 떼기까지 에나에게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막상 발을 움직이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모든 순간, 살아 움직이는 자신을 느꼈다. 생각보다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그의 걸음걸음이 말해주고 있었다.

 

메지카라에게도 미혼모에게도, 거식증에 걸린 인기 가수에게도 지긋지긋하기 그지없었던 일상이 새롭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봐봐, 세상에는 아직 빛이 있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살아보고 싶은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책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는 지구 멸망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스펙터클한 SF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끝에서 희망을 찾는, 다소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이다. 밑바닥까지 떨어져야만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반동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멸망이라는 단어는 단지 샹그릴라*를 떠올리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감히 그들을 동정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들보다 아름답게 마지막 한 달을 보낸 사람은 없을 테니까-

 

* 샹그릴라: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골짜기 또는 그런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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