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디지털 플래너 쓰기를 관두다 [문화 전반]

보이지 않는 곳에 흩어진 우리의 흔적
글 입력 2022.01.1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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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다이어리를 본격적으로 꾸미는 일은 여간 품이 드는 일이 아니다. 예쁜 디자인 다이어리는 값이 비싸니 신중하게 골라야 하고, 수만 가지의 스티커와 꾸미기 펜, 마스킹테이프 등을 구매하게 된다. 오늘 먹은 음식 사진을 넣고 싶다면? 미니 포토 인화기를 사거나 화가에 빙의해 손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예쁘게' 꾸미지 않고 그냥 써도 되는데,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텅 빈 새하얀 종이에 삐뚤빼뚤한 내 손글씨가 올라가니 그렇게나 멋이 없고 휑해 보일 수가 없다. 또 언제 어디서나 들고 다니기에는 사적인 얘기가 많이 담겨 있어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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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혜성과 같은 존재가 나타났으니 바로 디지털 플래너다. 아이패드를 비롯한 태블릿 pc 구매자라면 pdf 파일 위에 다이어리를 쓰는 디지털 플래너를 한 번쯤 시도해보게 된다. 오늘 먹은 음식, 가본 장소를 남긴 사진을 아이패드 화면으로 쓱싹 옮겨 일기를 작성할 수 있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스티커를 붙여넣을 수도 있다. 글씨가 삐져나갔다고 속상해하며 수정지우개를 들 일도 없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얼마든지 지웠다가 쓸 수 있으니.

 

그러다 보니 일기나 플래너뿐만 아니라 중요한 메모, 되새기고 싶은 문장, 순간 떠오른 영감 등의 작고 다양한 기록들도 아이패드 이곳저곳에 남기게 되었다. 노션, 에버노트, 기본 메모장, 데일리 노트, 감정 노트...... 사용자의 기록을 편하게 도와주는 생산성 애플리케이션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성과 편리함으로 똘똘 뭉친 디지털 세상의 기록은 크나큰 단점을 안고 있었다.

 

전자기기의 메모리칩, 인터넷 클라우드에 기록하기에 잃어버릴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상 잃어버린 데이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6개월 전의 일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이 양식, 저 양식 옮겨가며 써서 여러 파일을 뒤적인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어 적어놓은 구절, 어디에 있는지 한 번에 찾지 못한다. 이 앱 저 앱에 흩어져 있다.

 

실제로 이런 경험을 여러 차례 겪고 나니 느끼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이터로 남긴 나의 흔적들은 0과 1로 분리되어 어딘가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편리함과 효율성에 맡긴 내 기록들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 온전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반면에 손때 묻고 낡아버린 한 권의 종이 다이어리에는 어떤 한 해의 내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연초에는 기합이 쫙 들어간 반듯한 글씨체가, 분노가 가득했던 날은 예쁘게 쓰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휘갈겨 쓴 글씨가, 크게 빛났던 보름달을 본 날에 어설프게 그린 달 그림이 있었다.

 

획 하나하나가 똑같은 간격인 디지털 폰트가 아니라 그날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손글씨만 바라봐도 그날의 기억이 좀 더 생생히 떠오른다. 기록한 것은 종종 들춰볼 때 생명력을 가지는 것 같다. SNS에서 발견한 좋은 정보나 글을 북마크만 해둔 채 방치해버리면 죽은 정보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지난 시절 나의 다양한 모습과 기억, 생각들은 더더욱 방치해둘 수 없다. 가뜩이나 눈에 선명히 그려지지 않는 기억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매체에 완전히 기록한다는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디지털로 기록을 남기는 일을 아예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 21세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내 곁에는 아마 죽을 때까지 스마트폰이 함께 할 것이고, 그것만큼 빠르고 효율적인 기록장은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휴대 기기의 탄생으로 사람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스마트한 도구들은 우리 모두를 더 똑똑하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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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빠르게 획득한 이득은 그만큼 빠르게 휘발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킵해둔 기사글만 수백 개고, 나중에 글감으로 써먹어야지 하고 스마트폰에 써둔 메모는 스크롤을 저 아래로 내려야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똑똑한 도구들로 도움을 받았다면, 진득하게 글로 남겨두는 연습을 하고 있다.

 

좀 귀찮아도 자기 전에 오늘 하루 스마트폰에 적어두었던 메모들과 스크린샷, 사진들을 훑어보며 손바닥만 한 노트에 다시 남긴다. 그럴싸한 양장본 다이어리에는 줄 간격이 맞지 않는 일기를 쓴다. 그렇게 적은 기록들은 클라우드에 남긴 기록과 달리,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면 바스스 타 없어지겠지만, 한 번 꼭꼭 씹어먹었기에 내 안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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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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