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두르지 않는 삶: 사울 레이터 [영화]

글 입력 2022.01.0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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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돌아봤을 때 중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당시에는 그저 평범한 일상 중 일부인 경우가 있다. 친구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한 일이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평범한 일이 앞으로 더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기도 한다. 작고 누가 보기에는 거창하지 않은 '무엇'이 다른 시각과 상황에서 보면, 중요한 '시작'이 되는 것이다.


영화관이라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와 멀어지며 개봉작을 개봉 당일에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관객이 막 고단했던 4개월로 채워진 한 학기를 마치고 지쳐 쓰러진 대학생이라면 더욱 발생하기 어려운 일이다. 놀랍게도 그 희박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고 이젠 일반적인 시간보다 '500원'이 아닌(<조조 할인> - 이적) 무려 '4,000원' 저렴하게 볼 수 있는 '조조'로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이날 본 영화는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이다. 처음에는 보통 영화처럼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살아있는 한 예술가와의 대화를 영상으로 남긴 토마스 리치 감독의 '다큐멘터리'이다. 한국에서는 2021년 12월에야 개봉했지만 놀랍게도 촬영은 2010년부터 1년간 이루어졌으며 영국에서는 2013년, 미국에선 2014년에 이미 개봉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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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In No Great Hurry: 13 lessons in life with Saul Leiter'이나 한국에서 개봉할 때는 그의 이름이 가장 앞으로 갔다. 만약 그가 생전에 영화 제목의 뒤바뀐 순서를 봤다면 조용히 고개를 저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탄생하는 것조차도 망설였던 수줍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누군가의 창을 사진에 담았을 뿐이에요. 그렇게 대단한 업적은 아니에요. (...) 그(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그(나)에 대한 이야기를 남길 자격이 없어요. (웃음)

 

 

 

‘컬러 사진의 선구자’, ‘뉴욕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는 40년대에 사진 활동을 시작해서 50년 넘게 꾸준히 작업을 이어간 사진작가이다. 그의 작업이 한국에서는 영화 <캐롤>의 토드 헤인즈 감독이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후에 더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컬러 사진의 선구자'라고 부르고는 한다. 흑백 사진이 주를 이루던 50년대 사진계와 달리 그는 1948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컬러 사진을 찍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세와 다르게 뉴욕의 일상을 컬러로 담은 사진들을 보며 그가 선견지명이 있는 현명한 사람이라 빠르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컬러 사진을 처음 선택한 이유는 생각보다 영화 같지 않다. 당시 흑백 사진과 달리 컬러 사진은 인화 후 사진을 자를 필요 없는, 이미 잘라서 담긴 슬라이드 포장 형태로 판매했기 때문이다. '편리함'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세상이 그를 주목하게 했다.


나는 컬러 사진이 상자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 잘라낼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작은 상자 슬라이드에 들어 있었고 꽤 좋았으니까요.


또 그가 컬러로 카메라에 담은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사진을 컬러로 촬영했으나, 당시 다른 사진작가들은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의 사진은 사울처럼 간단하고 일상적인 것보다 무겁고 중요한 사건들을 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퍼스 바자에서 패션 촬영을 할 때도 비슷한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냉담한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길을 계속 나아갔다는 점에서 충분히 대단하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곤 한다. 사울은 분명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작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가치의 문제에서 나의 선택에 대한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제의 진실은 언제나 컬러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었다는 거예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나는 선구자로 묘사되어 왔어요. 내가 선구자인가요? 내가 선구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결국 많은 사람이 컬러 사진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평범함이 때론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의 지난 작업물들을 모아 2006년 첫 사진집 'Early Color'가 발간되었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일상적이지만 새로운 의미를 지닌 순간들을 본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저 평범하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에도 이 내용이 등장한다. 영상을 촬영하는 토마스 리치 감독에게 자신을 왜 찍는지 거듭 물어보며 현 상황이 언짢은 듯 장난친다. 그가 50년 넘게 사는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찍기 위해 유럽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싫지는 않은 눈치다.


그가 사진을 찍는 대상과 방식은 촬영을 시작하고 50여 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오래 한 동네,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살았기 때문에 공간 변화도 없고, 그가 좋아하는 구도와 대상도 창문, 빗방울, 우산, 거리 등으로 비슷하다. 달라진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방식처럼 사울 밖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같은 사람이 촬영한 같은 분위기의 슬라이드지만 시간이 흐르며 변한 사진 속 세부 요소들이 사울의 사진에 특별함을 부여한다.


그는 55년 동안 같은 동네를 사진에 담았고, 50년대의 자동차와 50년대의 사람들, 50년대의 패션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50년대 사람들의 특정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2011년에도 같은 레이터의 스타일로 작업했죠.


늘 어질러있는 방에서 자신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사진들을 박스에서 찾아 소개하고, 역시나 어질러진 부엌에서 불안하게 음료를 데워 마시는 모습은 평범한 80대이다. 영상에 찍히고 있는 동안에 그는 자주 카메라를 든다. 영상은 사울이 밖을 나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따라가며 결과물만으로는 알 수 없던 그의 작업 과정을 기록한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사울이 애정의 눈으로 뷰파인더 속을 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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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솔직하게 사진 찍는 사람이다. 개인 작업을 할 때나 잡지에서 일할 때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원하는 색으로 담는다.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는 그가 애호하는 대상은 '비/눈'과 '우산'이다. 영화 중간중간 작품 제목과 제작연도로 간단한 소개와 함께 등장하는 그의 사진들을 보면 유독 다양한 색의 우산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직접 유명인의 사진보다 빗방울로 덮인 창문이 더 흥미롭다고 말한다. 그에게 기쁨과 흥미를 주는 일상적 대상은 그의 순수한 애정이 들어가 특별한 작품이 되었다.

 

 


예술적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


 

누구도 홀로 유명해질 수 없다. 이름을 널리 알리려면 다른 누군가 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고 좋아하고 관심으로 계속 지켜봐야 한다. 사울 레이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깨달았다. 그는 홀로 위대한 사진작가가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에 관심을 두고 사진집을 내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이 만든 영화에 영향을 준 인물로 소개하며 대중에게 더 알린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사울의 사진에서 감명을 받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눈에 보이는(책과 영화) 도움을 준 것뿐 아니라 그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사람들도 있다. 그에게 처음 카메라를 선물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어 생활에 대한 걱정보다 사진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그의 어머니, 그의 작품을 정리하고 오랜 세월 안전하게 보존하고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보관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울 레이터 재단 설립자 'Margit Erb'가 그렇다.


당신도 알다시피, 사물이 사람과 섞이는 방법이 있죠. Margit과 같은 사람들과 나는 달라요. 내가 젊었을 때 내 삶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Margit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모든 흑백 사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을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에게 이 사진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때, 나는 '오, 그럼요'라고 대답하고 그것을 꺼내 인쇄했겠죠.

 

그리고 또 한 사람, 그의 오랜 친구이자 뮤즈이자 연인인 'Soames Bantry'가 있다. 영화에서 사울이 사진 다음으로 가장 사랑을 드러낸 존재이다. 사울의 모델이었고 함께 예술과 그림, 책과 사진을 비롯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같은 건물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줄곧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답변을 하던 그는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도 그의 사진이 지닌 진가를 믿고 함께해 준 Soames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했다.

 

나는 가끔 그녀가 멋진 스튜디오와 판화 모음집처럼, 그녀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줄 수 있는 매우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 사람들이 내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에도 Soames는 나를 믿었어요. 그녀는 그런 의미에서 항상 헌신적이었죠. 그녀는 내가 비범한 색채 감각을 가진 아주 훌륭한 사진작가라고 생각했어요.


*


원제처럼 영화는 13가지 주제로 편집되어 있고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사울에 대해 한 층 깊이 알게 된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편집한 부분인지 실제 시간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뒤로 갈수록 사울의 깊은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 12장, 13장의 이야기가 특히 오래 떠올랐다. 12장은 영화 제목과도 연관이 되는 '서두를 이유는 없다'에 대한 이야기이고, 13장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에 대한 사울의 의견이다.


두 내용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빠르게 흘러가는 요즘 세상에 그 속도에 맞춰 달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을 보면 이미 내가 있는 곳에서 멀어져 더 이상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든다. 동시에 늦게라도 대열에 합류해 달리기 위해 신발 끈을 조여야 하나 걱정하며 조급함을 느낀다. 이때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울의 이야기를 들으니 숨이 조금 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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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가 이미 인생의 빠른 시간대를 지나 충분히 느긋할 수 있는 시간대에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말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80이 넘은 그에게도 20대 숨 가쁜 시간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힘들었던 기억이 잊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심각하게만 느껴지던 많은 것들이 잠시라도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봐요. 사람들이 심각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심각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은 실제로 걱정할 가치가 없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대단한 작가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는 어떤 거장이 읊을 것 같은 촘촘한 시간 계획 혹은 예외 없이 매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 깔끔하게 정리되어 언제든 누군가에게 소개할 준비가 되어있는 작업물들과는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집을 옮기는 게 귀찮아서 한곳에 오래 머물며, 여유 있게 거리에 나가 산책처럼 작업하는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게 뭘지 답을 찾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고 행복하게 만든 건 의외로 사울 본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보다 자신이 아끼고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선택한 것 또한 사울이 계속 살도록 하고 삶을 지키는 요소에 집중한 태도이다. 본연의 나를 만드는 요소들(그가 사랑하는 사진, 피사체, 사람)에 우선순위를 놓고, 세상의 것에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산다면 누구나 평범함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사울 레이터의 일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큰 감정 변화 없이 편안하게 보다가 한 번, 눈물이 예상치 못하게 왈칵 나온 순간이 있었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아직 영화 '제작'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하던 사울이 완성된 영상을 보며 말하는 때이다. 잘 될 것 같아요. 너무 심각한 것들만 제대로 편집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담은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 나에게는 본인의 삶 자체에 대한 인정으로 느껴졌다. '나 나름 괜찮게 산 것 같아요'라는 말처럼 들렸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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