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이토록 찬란한 어둠

글 입력 2022.01.0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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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기회가 많았다. 공연예술을 업으로 삼기로 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닥치는 대로 보았고, 관련 지식을 쌓기 위해 사방을 뒤지고 다녔으며 언젠가 무대에 오를 ‘나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메모를 끄적였다. 누구도 모를 창작의 고통, 나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인고의 시간. 이것들이 쌓여 빛을 발하리라는 믿음을 손에 꼭 쥐고 긴 밤을 지새웠다.

 

혹자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인생이라, 좋겠다”라며 부러움을 표한다. 하지만 예술이 사교의 목적을 가지는 여가 활동일 때나 마음껏 즐기는 것이 가능하지, 직업일 때는 아니다. 심지어 그것이 노동과 자본의 가치로 환산된다면 남모르는 고심은 더욱 깊어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직업으로서의 예술이 갖는 무게가 막중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특히 뮤지컬 업계는 한국에서 급성장을 이룩한 분야이기에, 관련 인프라가 탄탄히 구축되었다고 확신하기에는 부족하다. 물론 과거와 비교하면 뮤지컬 관객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했고, 자신 있게 국제 시장에 내놓을 만한 창작 작품이 많이 상연되었거나, 지금도 개발되는 중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뮤지컬 창작진들이 오롯이 뮤지컬을 하며 먹고 살 만큼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관련 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게끔 넉넉한 인적 자원과 공적 자원이 제공되는가? 아직은 이러한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열정을 갖는 이들에게, 뮤지컬의 역사를 써왔던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훌륭한 가르침이 된다. 그들이 고군분투하며 직접 겪었던 생생한 경험은 나와 같은 후세대 예술인에게 넉넉한 가르침이 되어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비교한다면 아직은 부족한 인프라이기에, 우리나라 뮤지컬 업계 종사자들의 가르침은 더욱 뜻깊고 귀하다.

 

아마 한국에서 활동하는 뮤지컬 음악감독을 꼽아보라면 많은 이들이 ‘김문정’ 석 자를 외칠 것이다. 그만큼 김문정 감독이 한국 뮤지컬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와 업적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그러니 이번에 출간된 그의 에세이 <이토록 찬란한 어둠>은 그간 걸어온 김문정만의 역사와 경험이 담긴 소중한 일기장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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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덤도, 뮤지컬 연주자도, 뮤지컬 연출가나 창작진도 전혀 없었던 가난한 시절부터 지금의 빛나는 한국 뮤지컬이 있기까지, 김문정 감독이 손수 이룩한 성과는 뮤지컬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하다. 뮤지컬은 종합예술이기에, 무엇보다 주변 이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에세이를 읽으면서, 김문정 감독이 다른 이들과 맺었던 유기적인 관계가 뮤지컬 산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토록 찬란한 어둠>에는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했던 젊은 음악가 김문정이 뮤지컬 <둘리>를 통해 관련 업계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된 일화부터, <명성황후>를 통해 세계 무대를 거쳐 글로벌 슈퍼 바이저들과 소통하고, 한국 창작 뮤지컬의 발전을 이끌기 위해 여러 작품에 참여했던 경험까지 알차게 담겨 있다.

 

그가 각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는 것도 무척 즐거웠다. 뮤지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물을 글썽이거나, 박장대소할 만한 포인트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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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텀>

 

 

책에서 김문정 감독이 언급한 것처럼, 극예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거짓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장에서 언어의 장벽과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누군가의 삶과 희로애락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공연예술만의 특권이다. 이러한 무대 위의 환상을 창조해내기 위해 관객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김문정 감독은 이 책에 자신의 역할에 걸맞게 무대 밑 어둠 속, 연주자들의 수고로움에 집중하여 자전적인 경험을 녹여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무대 위 배우의 노력뿐만 아니라, 어둡고 좁은 오케스트라 피트 안의 남모를 땀방울이 얼마나 찬란한지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다. 관객으로서도 이들의 노력에 박수와 감사를 보내고 싶지만, 내가 낸 티켓의 값이 이들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이것은 비단 연주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앙상블 배우들이나, 연출가, 디자이너, 무대감독, 오퍼레이터 등 다양한 직군의 예술가들이 아직도 힘겹게 일하고 있다. 흥행 뮤지컬을 탄생시킨 작가나 작곡가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저작권료가 미지급되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김문정 감독은 에세이를 통해 한국 뮤지컬의 아름다운 면면뿐만 아니라, 이러한 병폐들에 관한 생각도 소신껏 밝혔다.

 

나 또한 이 대목을 읽고 우리나라 뮤지컬의 기형적 구조를 비판하고 싶었다. 주연급 배우들에게만 주어지는 막대한 출연료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연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예술인이 그들의 수고로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의 금액은 받아야 한다. 노력한 만큼의 경제적 이득도 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뮤지컬 외의 여러 직업을 병행하며 무대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이와 마음이 맞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는 <이토록 찬란한 어둠>을 읽는 시간이 마치 김문정 감독과 차 한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뮤지컬을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사명처럼 느끼는 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훌륭한 배움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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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정 감독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뮤지컬의 양분이 되었고,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기준점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다른 동료에게 미칠 파동을 쉽게 여기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예술인이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국 뮤지컬에서 김문정의 영향력이 새삼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대목이었다. 또한, 언제나 맡은 바는 끝까지 책임 있게 해낸다는, 그 쉽지만은 않은 다짐을 실천하는 인생의 태도가 무척 존경스러웠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그 처음의 고난을 온몸으로 이겨낸 김문정 감독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그를 포함해 한국 뮤지컬의 역사를 개척한 이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책을 읽으며 내가 걸어갈 길, 그들이 걸어온 길을 한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이토록 찬란한 어둠>, 우리의 뮤지컬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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