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기억에 기대어 - 나뭇잎의 기억

글 입력 2022.01.0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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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끝난다. 이 말처럼 분명하고 잔인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말이 있을까.

 

학교는 졸업하고 직장은 그만두게 되고 사람들과는 헤어지며 우리는 죽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끝을 향해 내달리는 운명이다. 무엇이든지 끝날 수밖에 없다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생각하게 된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부산물들은 결국 기억이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그 기억마저도 어떤 대상이나 한 시절을 온전하게 담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기억은 그러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서야 겨우 유지된다는 점에서 연약하다. 그러나 불확실한 삶 속에서 끝없이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점에서 기억은 무엇보다 힘이 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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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의 기억>은 그 제목처럼 기억이라는 것의 연약하고도 강한 속성을 이야기하는 그림책이다.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아티스트인 스티븐 헉튼의 데뷔작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파스텔톤의 그림체가 돋보인다.

 

그림책에는 사람이 아닌 나무들이 등장하고, 나무들이 갖고 있는 나뭇잎은 기억을 상징한다. 큰 나무에는 나뭇잎이 무성하지만 작은 나무는 아직 나뭇잎이 몇 없다. 나뭇잎에 궁금증이 많은 작은 나무를 데리고 큰 나무는 여행을 떠난다.


큰 나무는 자신이 살아가며 배운 것들을 작은 나무에게 차근차근 알려준다. 자기 주변을 챙기고 품을 내어주는 법, 역경을 이겨내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 이들은 함께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난다. 하지만 모든 여정에는 끝이 있다. 큰 나무가 떠나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추운 겨울날 작은 나무는 홀로 남겨진다.


혼자가 된 작은 나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큰 나무와 함께했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단순히 생존법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함께한 기억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 작은 나무는 기억에 의존해 겨울을 살아내는 법을 배운다.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곧 다시 봄을 맞을 것이고 사계절을 몇 번 더 지나면 작은 나무에게도 잎이 무성해질 것이다. 전달받는 입장에서 전달해주는 입장이 된 작은 나무는 때가 되면 끝을 맞을 것이다. 그가 가진 기억들은 다음 나무에게로 전해진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떠나간 큰 나무와, 홀로 길을 찾아가야 하는 작은 나무의 모습은 부모와 자식, 기존 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보는 듯하다. 두 나무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이미 겪었거나 언젠가 겪어야만 하는 일들이다.

 

나이가 들고 세대가 바뀌고 세상에 존재하던 것이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나뭇잎의 기억>은 따스하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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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나무가 나무임을 알려주는 가장 표면적인 특징인 것처럼 사람에게 기억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요소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기억을 갖고 있고, 그런 기억들이 고유한 모양으로 쌓여서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마치 햇볕을 받은 나무가 자연스럽게 새잎을 만들어내듯이, 기억은 때때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2022년은 또 어떤 기억들로 채워질까.

 

큰 나무가 사라지는 순간을 비롯해 앞으로도 수많은 끝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끝을 대비한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작년 한 해만 돌이켜봐도 끝은 늘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러므로 끝을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끝이 언제 올까 내다보는 게 아니라 그저 함께하는 순간에 집중하며 묵묵하게 기억을 쌓아 올리는 일이다. 언젠가 무언가의 끝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내가 그 기억들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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