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의 고뇌 - 김용준의 근원수필 [도서/문학]

아직도 몸보다 마음이 분주한 세태인지라
글 입력 2022.01.0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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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나 남 할 것 없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 근원수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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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을까. 내 경우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시험을 보고 그 결과의 등수가 나를 정의하는 한 부분이 된 이후로 내 삶은 그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참 오랫동안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 경쟁의식을 갖추고, 자기발전은 필히 지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신념으로 삼았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모두 다 그렇게 산다고 다독이면서 보냈던 그 날들, 마음 한구석에서 울리는 작은 목소리를 나는 애써 듣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괜찮은 게 맞을까.

 

이는 오롯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수백 년 전을 살았던 이들도 마음에 여유를 담기 보다는 바쁜 일상을 탓하며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뭐든 잘하고 싶고, 잘하기 위해 살아야지 하다가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 하나가 아니라 둘, 셋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자기반성을 넘어 자기비하에 빠지는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런 맥락에서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쓰는, 화가이면서 문인으로서 흔적을 세상에 남긴 이들은 항상 내게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글로 그림으로 각자의 뛰어난 예술성을 표현하는 재인들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광복 전후 한국의 신세대 화단을 주도했던 화가였으며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근원 김용준의 수필집인 “근원수필”도 내가 접하게 된, 그러한 흔적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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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서 근원은 김용준의 호를 가리킨다. 생전에 근원(近園)·선부(善夫)·검려(黔驢)·우산(牛山)·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등 여러 호를 가졌던 그는 근원의 원으로 원숭이 원을 썼는데 그래도 원숭이 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위의 권고에 근본 원자를 썼다고 한다.


중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정도로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근원은 화가이자 수필가, 미술비평가로 활동했다. 30편의 수필을 묶어 출간한 근원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의 백미’,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수필에는 그가 보낸 일상과 주변 환경에 대한 심사를 포함해 미술비평가로서 그가 소개하는 조선 미술사 사설, 예술을 바라보는 그의 소감 등이 담겨 있다.


본 오피니언에서는 수필집 중 인상 깊게 읽은 글 몇 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매화를 향한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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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아직 잠들어 있을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는 오랜 시간 지조의 상징으로 자리해왔다. 하얗게 피어난 꽃송이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문인화의 화제인 사군자 중 하나로서 오랜 시간 동안 꽃이 상징하는 고결함을 떠올려보자면 어쩐지 마음의 흐트러짐도 바로잡을 수 있을 듯하다.


근원수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 바로 매화를 주제로 적은 글일 것이다. 근원이 "선생"이라고 지칭하는, 집에 매화나무가 있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의 글은 매화를 향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있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 있습니까..."


"하고많은 화초 중에 하필 매화만이 좋으란 법이 어디 있나요. 정이 든다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는가 봅디다...."


"백화가 없는 빙설 속에서 홀로 소리쳐 피는 꽃이 매화밖에 어디 있느냐 합니다. 혹은 이러한 조건들이 매화를 아름답게 꾸미는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실로 이러한 많은 조건이 필요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를 대하메 아무런 조건 없이 내 마음이 황홀해지는 데야 어찌하리까."

 

  

만개한 꽃이 주는 황홀함 때문이었을까, 시대를 넘어 품어온 경건함의 상징이어서였을까. 그 자신도 이유를 분명히 정의할 순 없지만 근원은 매화를 바라보며 마음에 충만한 아름다움을 채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대 속에서도 통상적으로 바쁘게 사는 것이 미덕이었나 보다. 친구에게 매화 구경을 가자고 한 그는 꽤나 한가로운 사람인가보다는 조소를 듣는다. 대꾸하지 않은 채 그는 그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고, 어쩌다 사람들은 매화를 바라볼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차갑게 식은 마음으로 바쁘게 살아가게 되었을까. 그의 질문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도 풀리지 못한 채 남아있다.

 

 

 

예술이란, 예술가란


  

수필집에는 당대 미술계 뿐 아니라 조선 미술사, 고구려 미술사에 대한 근원의 시론이 함께 엮여있다. 평소 예술은 예술 그 자체여야 한다며 순수예술성을 주장했던 근원의 기조에 따라 수필에는 그가 살던 현재와 과거의 예술을 바라보는 그만의 시선, 그리고 그 모습에 대한 비판 어린 논조도 솔직하게 담겨 있다.

 

과거의 예술가들의 사례와 현대인들이 예술 작품을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 근원의 태도는 한결같다. 예술 작품에는 격이 있으며 그 격은 예술가의 인격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그저 오래된 서화, 뛰어난 명필가의 글씨라면 사 모으려는 이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그의 글에는 근원이 진정한 예술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숙한 인격을 갖추는 것을 우선 가치로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결국 완성된 인격의 반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되기 전에는 예술이 나올 수는 없다. 미는 곧 선이다. 미는 기술의 연마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인격의 행위화에서 완전한 미는 성립한다. 기술을 부육이라면 인격은 근골이다. 든든한 근골과 유연한 부육이 서로 합일될 때 비로소 미의 영혼은 서식할 수 있다." - 예술에 대한 소감 中

 

"예술가와 세인의 현격한 차이는 요컨대 예술가는 성격의 솔직한 표현이 그대로 행동되는 것이요 세인의 상정은 성격이 곧 행동될 수 없는 곳에 있다.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솔직한 성격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최북과 임희지 中

 

"고인의 작품을 상품으로써 싸우고 서화 골동을 수집함으로써 헛된 지위를 자랑하고 완물상지하는 것만도 우리의 정신생활에는 그 손해가 적지 아니하겠거늘 하물며 청빈한 덕을 길러야 할 학문인, 예술인들이 부질없이 향간의 불학무식배의 행세거리로 내세우는 소위 ‘골동취미’에 탐닉하여 멀리 학인의 진지한 태도까지 상실하게 된다면 이는 더울 삼갈 일이 아니랴." - 골동설 中

 

 

 

어려움과 고됨 속에서도 자유를 희망하며


 

 

“남에게 해만은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 달라.”

 

-저자 후기 中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은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근원 역시 수필을 글 중에서도 제일 까다로운 글이라고 말한다. 후기에서 그는 스스로 "그림 한 폭도 변변히 못 그리는 주제"라고 소개하며, 다방면이 책을 읽고 인생의 여러 경험을 해 본 후 자연스럽게 적혀지는 글이 수필 다운 수필일 것인데 어떻게 자신이 책을 내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고 되뇐다.

 

자신의 생각과 감상을 글로 세상에 남기는 과정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를 뛰어넘어 글을 적게 된 계기로 근원은 호소할 길 없이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울분을 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가가 꿈꾸는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그의 현대 사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자유를 바라는 근원은 자신의 갑갑한 심사를 수필집으로 남긴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도 아직 세상은 몸보다도 마음이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지금의 사람들도 근원의 고민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나는 내가 끄적이는 글을 찬찬히 읽어본다. 한없이 얕은 생각과 폭이 좁은 경험의 소유자가 적어내는 것의 결과물은 미진해 보인다. 그러나 스스로 다독이며 이를 뛰어넘는다면 새로운 자유로운 심사가 나를 반긴다. 이는 시대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을 담은 책이 주는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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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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