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면 [영화]

글 입력 2021.12.2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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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가장 단순한 것부터 떠올려보자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이름과 국적, 외모 정도가 있겠다. 그러나 단순히 외적인 요소로만 판단 짓기엔 인간은 지나치게 고차적이고 관념적이며 복잡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우리는 인생 전반에 걸쳐 성장하고, 자신을 명확히 규정지어나간다. 타고난 성격과 재능은 개인의 사적인 취미와 목표가 성장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한다. 인생은 실패와 성장을 통해 끝없이 나를 규정짓는 일의 연속과도 같다.

 

독립된 개인이 특별한 이유는, 공동체에 속한 모두가 타인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만의 성격과 특성을 가졌기 때문일 테다. 인간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라는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타인의 영역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발견하고 구축해온 나만의 고유한 모습이다. 만일 나의 성격이나 특성이 오로지 타인에 의해 정의 내려진다면, 우리는 늘 수동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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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루 재스민>은 '나'를 올바로 정의하지 못해 내외적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인물 ‘재스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재스민이 비행기에서 옆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처음 만난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재스민의 모습을 통해 처음에는 그가 사교적이고 친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수화물을 찾는 곳까지 이어진 대화를 듣고 보니 문득 이 상황에 ‘대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스크린 속에는 재스민의 일방적이고 맥락 없는 혼잣말만이 두 사람의 공백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스민에게 무언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하게 된다. 아직은 그녀가 어떠한 연유로 비행기에 올랐고, 왜 자꾸만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는지 모르기에 재스민의 행보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따라간다.


시간의 교차 편집이 여러 번 이루어지고 나서야 관객은 재스민이 한때 최상류층 집안의 귀부인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당시 재스민의 남편 할은 부동산 거래와 금융 사업의 성공으로 엄청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불법 자금 운영의 놀음판이나 다름없었던 사업의 실체가 곧 세상만사에 밝혀지면서 재스민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할이 감옥에 간 사이 집안 재산은 몰수당하고, 아들 대니는 집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 재스민은 유일한 가족으로 남아 있는 동생 진저의 집에 일정 기간 머무른다. 뉴욕에서의 화려한 삶과 달리 시골 동네에서 살아가는 진저의 세상은 무척이나 작고 소박하다. 환경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영화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재스민의 성격장애가 과연 주목할 만하다. 재스민에게는 성격장애의 하위유형에 속하는 A군 성격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고루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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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군 성격장애의 경우, 재스민은 조현형(분열형)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현형 성격장애를 앓는 이들의 특징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극도의 불편함을 느끼고, 기이한 사고와 지각 및 특이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재스민이 뉴욕에 살고 있을 당시, 동생 진저와 그의 남편 오기가 놀러 왔던 때가 대표적이다.

 

비록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도 않고, 친자매 역시 아닐지언정 재스민과 진저는 오랜 시간 끊이지 않는 유대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러나 재스민은 진저의 뉴욕 방문이 불편하기만 하다. 자신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에 비해 시골에서 갓 올라온 듯한 인상을 주는 두 사람이 다소 초라해 보였기 때문일까. 재스민은 진저의 저녁 초대나 쇼핑 제안에 몹시 피곤한 기색을 느끼며 동생과 그의 남편을 진정으로 환대해주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조현형(분열형) 성격장애와 한쌍을 이루는 조현성(분열성) 성격장애의 경우, 타인과의 거리 유지와 더불어 왜곡된 인지 지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또 정신증적 이상을 보이거나 행동적 측면에서도 기괴함이 나타난다. <블루 재스민>의 오프닝서부터 재스민은 유사한 성격장애의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고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오프닝에서의 재스민이 뉴욕 생활 몰락 직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행기에서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재스민이 외부 세계의 타인을 인격적인 하나의 객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감정을 되는대로 털어놓기 바쁜 재스민의 모습에서 대화 상대를 향한 존중이나 배려의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

 

재스민은 거듭 최상류층 당시 누렸던 부와 명예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재스민의 사고와 정신세계가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과거의 잔상에 머물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혼잣말을 내뱉는 기이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재스민은 또다시 우울증약과 술에 기대는 악순환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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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군 성격장애 외에도 재스민에게는 경계선 성격장애와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해당하는 B군 성격장애가 나타난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는 이들은 대인관계를 비롯하여 반복적으로 불안정성이나 충동 행동을 보인다. 전 남편 할의 외도와 배신으로 극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재스민은 여전히 남성의 부와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정의하고 규정짓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할의 몰락 이후,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파티에서 드와이트라는 인물을 만난다. 재스민에게 드와이트는 부와 명예를 모두 지닌 이상적인 남편감이나 다름없었다. 재스민은 직업과 재정 상태를 속여 자신을 소개하는 등 그와의 관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발버둥 친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는 이들처럼, 재스민 역시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반복하며 불안정한 대인관계 패턴을 보인다.


부와 명예 없이 재스민은 만성적인 공허함을 느낀다. 빚더미에 앉은 상황에서도 비행기 일등석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딜 가든 명품 옷과 가방을 몸에서 떼어내지 못한다. 재스민에게 부와 명예는 자신을 정의하는 모든 것이자 이상적인 자기 모습이나 다름없다. 자기 복잡성의 관점에서 재스민은 다양한 차원으로 자신을 이해한다기보다 오직 한두 가지의 제한적인 요소만으로 본인을 이해하고 파악하려 든다.


영화 전반에 걸쳐 재스민은 경계선 성격장애뿐만 아니라 강한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드러낸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앓는 이들은 자신의 탁월한 성공과 권력, 아름다움에 대하여 확신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기대하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인다. 과대망상, 선망, 욕구, 공감 능력 결여는 모두 재스민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재스민은 동생 진저와 자신을 거듭 하향비교하며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확신한다. 이에 따라 비교적 하위 계층에 속하거나 외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아 보이는 이들과는 철저히 거리감을 두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행위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재스민이 할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와의 뉴욕 생활을 이어갔는지 아니면 할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부와 명예 때문에 그와 결혼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결국 할의 불법적인 금융 사업을 신고한 건 재스민 자신이었다. 만일 재스민의 최종 목적이 할과의 진실한 사랑을 맺기 위해서였다면, 그녀는 과연 할의 불법적인 행보를 그리도 충동적으로 고발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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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화는 처음부터 재스민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프닝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재스민은 거듭 할과 처음 만난 날 ‘블루문’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블루문’이라는 노래의 제목이다. 우선 블루문이란 무엇인가. 블루문은 달빛의 색과 관계없이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경우, 두 번째로 뜬 보름달을 일컫는 말이다. 블루문이라는 명칭은 서양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동양에서는 보름달을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 보름달이 뜨는 시기에 각종 기념일이나 전통 풍속을 행했던 반면 서양에서는 보름달이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로써 한 달에 보름달이 2번이나 뜨는 불길한 현상을 블루문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재스민과 할이 처음 만난 순간에 흘러나온 곡이 ‘블루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화는 처음부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불운을 가져다줄 존재임을 암시했는지도 모른다. ‘블루문’은 같은 선상에서 <블루 재스민>이라는 영화의 제목과도 직관적으로 연결된다. Blue라는 단어는 ‘의기소침한, 낙담한, 우울한; 우울증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블루 재스민’이라는 표현을 표면적으로 해석하자면 ‘우울한 재스민’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 영화의 중심 곡에 해당하는 ‘블루문(Blue Moon)’에 Moon 대신 Jasmine이라는 이름을 대입하여도 같은 제목으로 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Blue Moon’ 대신 ‘Blue Jasmine’으로 대상을 전환함으로써 불운을 뜻하는 Moon과 Jasmine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주인공 재스민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재차 발견하기 때문일 테다. 끊임없이 부와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순간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 스스로 내적 발전을 갈망하면서도 나를 더욱 잘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나 마음 편히 살아가고자 하는 헛된 욕망. 이 모든 것이 현대인의 고질적인 모순과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에 영화 <블루 재스민>은 어떤 의미에서 섬찟하고 애처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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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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