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굉음을 내며 흔적을 남겨야만 횡단할 수 있는 거리

글 입력 2021.12.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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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듣는 행위에는 많은 과정이 따른다. 적절한 매체와 거리를 통해 소리가 일정 크기로 전해져야 하고, 언어는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메시지로서 발화자의 의도와 청취자의 관점을 거쳐 해석되고 인식된 후에야 듣는 과정은 완료된다. 듣는 것은 상당한 의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매체도, 언어도, 발화와 청취의 기회도 나날이 다양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매일 더 많이 ‘들어야’ 하는 상황에 당면한다. 완전히 고립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어울리고 부딪쳐야 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를 수행하지도, 권리를 누리지도 못하는 이들이 있다. 소리를 전달할 매체를 가지지 못하거나, 먼 거리에 있거나, 낼 수 있는 소리가 작거나, 다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에게는 발화도 청취도 지난하다. 의무와 권리로 성립하는 시민의 범주에서 낙오되는 이들에 대해 개인이 아닌 사회조차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듣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순전히 사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대부분 사회가 구성한 권력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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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슨》은 무겁다. 어떤 소리는 의도적으로 듣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해체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온갖 비극적 요소를 더해 만든 가상보다도 더욱 절망적이고 끔찍하게 다가오는 현실성으로 관객의 심리를 압도한다. 가난한 이민자 출신인 가족이 겹겹의 차별로 둘러싸여 발화와 청취에서 고립되고 소외되는 과정과 이로부터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인물들의 처절한 모습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서스펜스가 아니라 현실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재난이기에 그 공포와 압박은 피부로 느껴진다.

 

벨라가 세 남매를 키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대도시 런던에는 아이를 양육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가정의 자녀를 부모의 의사와 상관없이 적절한 환경으로 규정된 가정으로 입양시키는 강제 입양 정책이 있다. 가정환경의 적절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정부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자세 때문에 벨라와 가족은 스스로 공권력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복지의 사각지대로 향한다. 벨라가 농인인 자녀 루의 보청기조차 지원받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루가 지원 대상이 되고 국가의 관리에 놓이는 순간 아무런 이유 없이도 늘 의심과 오해를 받는 벨라의 가정이 자녀를 양육하기에 부적절한 환경으로 구분되어 무참히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루의 몸에 난 멍이 학대의 흔적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고, 복지국은 벨라의 집을 엄습하여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세 자녀 모두를 데려간다. 부모가 아이를 회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부모와의 교류를 일절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이들을 데려온 명분이었던 루의 멍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복지국은 아이들을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채 방치된 피해자로 규정하고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가정으로의 입양을 진행한다. 이미 쌓아놓은 벽 너머의 소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복지국에 맞서, 벨라는 남편 조타와 함께 자녀들을 되찾기 위한 투쟁의 목소리를 외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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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이 벨라의 가정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벨라가 양육자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이 자격을 갖춘 가정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결론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듣지 않는 것이다. 벨라가 복지국의 일방적인 입양 절차에 항의하자 그들은 서류 속 벨라의 사진에 공격적이라는 낙인을 찍고, 극적으로 면회를 온 벨라와 조타가 자녀들과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를 쓰자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수어를 수상한 수신호로 취급하며 금지하고, 벨라가 이를 따지자 면회를 중단시킨다. 이민자라는 이유로, 농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 있다는 이유로 벨라와 가족은 기본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다. 하나의 언어만을 듣는 이에게 이는 단지 제지해야 할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복지국의 직원들은 이성적이고 부드러우며 차분하다. 그렇게 말해도 모두가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벨라는 거칠고 요란하며 우악스럽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벨라가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고 이에 저항하면 그것을 이유로 또다시 불이익을 받는 악순환은 이러한 불균형에서 기인한다. 특정한 방식에 항의하고자 하면 그 방식대로 항의하라는 식이다. 이렇듯 복지국이 모순과 폭력으로 점철된 절차와 제도를 밀어붙일 수 있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이 선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아동학대를 방지한다는 선한 당위와 이를 위해 어떠한 불합리한 과정이라도 마땅히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신념은 소외 계층의 배제와 기성 구조의 유지를 간편하게 정당화하기에 정부의 강제력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한다. 국가의 대의를 위해 어떤 목소리는 소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실제로도 보편적으로 자리하고, 누구나 그 목소리에 해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호응과 함께 더욱 공고해진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벨라는 직접 재판에 나서 자신을 변호하기로 한다. 수년을 견뎌 온 벨라의 외침은 애달프다. 벨라는 농인이라는 이유로 입양을 희망하는 가정이 나타나지 않아 보류 상태에 있는 루에 관해 이야기하며 국가가 규정하는 좋은 가정이 정작 자녀를 원하지 않는 상황이 반증하는 입양 정책의 모순을 지적한다. 또한, 자녀는 사고 팔리는 상품이 아니라고 역설하며 유일하게 루를 원하고 사랑하는 벨라의 가족만이 루에게 적절한 가정일 수 있음을 간과하는 복지국을 질타한다. 정부가 탓해야 할 것은 벨라의 가난이 아니라, 이민자라는 이유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고 조타가 겪고 있는 임금체불 등 부당한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구조적 빈곤의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서 찾는 정부 자신이다. 이렇듯 무책임하고 비민주적인 사회만이 루에게 부적절한 환경인 것이다. 벨라와 조타는 재판에서 승소하여 루를 되찾지만 갓난아이 딸 제시의 입양은 결국 막지 못한다. 영화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회와 가족 간 가로막힌 벽을 상징하듯 복지국의 꽉 닫힌 문을 비추며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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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벨라의 대사가 두 번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복지국 측에서 벨라를 이해한다고 한 상황에서 발화된다. 한 번은 자녀들을 강제로 데려가는 상황이었고 한 번은 입양 소식을 전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알게 된다. 이해를 위시하고 대화를 표방하지만 듣지는 않고 말하기만 하는 행위가 곧 정부와 사회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발화와 청취가 일방적인 관계는 결코 이해가 오갈 수 없다. 작은 한숨 소리조차 메시지로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목이 터질 듯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듣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인이 되는 사람은 악인이 되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대부분은 이해하지 ‘않는다.’

   

후자는 전자가 누리는 권리의 극히 일부분을 얻기 위해서라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야 한다. 벨라는 재판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면서도 그럴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어차피 졌다고 술회한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소중한 존재를 잃을 것을 감수해야 가족과의 행복이라는 기본적인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회의였을 것이다. 어차피 벨라의 가족을 향한 차별은 계속될 것이고, 루를 되찾았으나 제시를 떠나보낸 것처럼 위험은 언제나 도사릴 것이며, 재판에서 약속했듯이 벨라와 가족은 영국을 쫓겨나듯 떠나야 한다. 불균형은 그 자체로 개인의 삶을 무너뜨린다. 비단 영화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기에 영화의 결말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오며, 현실을 뼈저리게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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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좋아하지 않는 벨라와 달리 루는 비행기를 발견하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그것을 전면 마주한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짧은 순간 자유를 만끽하는 루의 모습은 정착과 방황을 거듭하는 비행기의 그림자를 쓸쓸히 밟는 벨라의 모습과 상반된다. 커다란 비극이 벨라의 가족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루가 또 다른 땅에 정착할 다음 세대에서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경계 없이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처럼 자유만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굉음을 내며 흔적을 남겨야만 횡단할 수 있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두 팔로 가득 안고 귀를 기울인 후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해야 한다. 모두의 빠짐없는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이제는 정말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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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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