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 :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열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
글 입력 2021.12.1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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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덮으며 내가 느낀 것은 ‘불친절하다’였다.

 

글을 읽으며 내가 이제껏 얼마나 친절한 글들에 길들여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책을 읽고 평가하고 추천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책을 읽곤 평가는커녕 감상조차 말하기 어려웠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응, 응, 대답만 했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문학잡지 <파리 리뷰>에 실렸던 단편소설 가운데 작가들이 고른 열다섯 편의 소설과 그 소설을 고른 이유를 엮어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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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맨 앞장에 실린 편집자와 옮긴이의 말을 읽어 보았다.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는 문학 실험실’, ‘존재조차 몰랐던 세계를 발견하는 일’, ‘읽는 이마다 다르게 통과할 관문’


책을 다 읽은 후, 그 문구들이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다섯 편의 글은 이제껏 내가 경험해본 적 없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것들이었으니.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책을 막 덮은 후에는 이해가 안 되고 난해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막상 글을 쓰려고 이야기 해보고 싶은 글들을 추려보니 열편 가까이 되는 것이었다. 난해하기에 더 흥미로웠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제 1장. 흥미로운 소재



열다섯 편의 글 중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을 뽑으라면 꽤 자신 있게 <궁전도둑>을 내밀 것 같다. 단편소설 치고는 긴 글임에도 흥미로운 소재와 긴장감 있는 서사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로마의 역사를 사랑하는 선생님과 상위의원의 문제아 아들 세지윅 벨, 저도 모르게 범하게 된 비리로 인해 퀴즈대회에 세지윅을 올리게 된 선생님은 퀴즈 도중에 세지윅의 부정행위를 발견하지만 교장의 압박 속에서 모른척하고 만다. 하지만 그를 우승하게 둘 순 없었기에 퀴즈 마지막 문제로 그가 맞힐 수 없는 문제를 내고, 이야기는 38년 후, 기부를 위해 다시 개최된 퀴즈대회로 이어진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명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경고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중략)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로지 어느 유명인의 삶에서 일어난 예측 가능한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해서고...

 


<궁전도둑>은 주인공의 독백과 함께 시작되는데, 삶의 곳곳에 놓인 함정과 신념을 시험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해 나간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선생님은 도덕적이면서도 권력층과 부유층을 섬긴다. 그러면서도 부유층의 부정한 성공을 내버려두지 않기도 하고,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러한 입체적인 캐릭터는 사건에 현실감을 부여하면서도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가 진행하는 서사에 몰입하게 만든다. 로마의 역사를 사랑한다는 그의 특성조차 그에게 어떠한 서사와 전개력을 부여한다.


뒷장의 평론에 쓰인 것처럼 생생한 놀라움과 질감이 잘 표현된 글이었다.

 

*


재미있는 소재하면 <거짓말하는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는데, 당시 <파리 리뷰>의 편집장은 이 글의 첫 문장만 읽고 이 글을 잡지에 싣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와 다짜고짜 재워주라며 동생을 찾아온 형은 비행접시를 믿는 집단에서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 공포감을 먹고 사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겁에 질려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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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광적으로 내뱉는 형과는 다르게 동생은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마지막에 가 그는 결국 형의 부탁을 거절하는데, 그러한 상반된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터무니없는 집단에 홀려 책임을 저버린 형을 연민하게 만들고, 동생을 냉소적이라 느끼게 한다.


흥미로운 소재와 전개는 독자를 유도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누가 봐도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형인데도!

 

 


제 2장. 평범하지 않은 진행



<늙은 새들>은 임박한 죽음에 대비하는 아버지와 하나 남은 가족인 아들의 통화로 구성되었다. 아버지는 땅콩버터 병을 열기위해 병을 들고 도로가에 나와 치매로 추정되는 기행을 벌인다. 아들은 이미 아버지의 기행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그가 집 앞에서 길을 잃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고, 아버지의 위치를 알기 위해 많은 것을 캐묻는다. 그는 절박했지만 여유로웠고, 끝내는 침대로 기어 들어가기까지 한다.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그는 스스로가 나이 들고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아버지의 노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상실을 외면하는 듯 했다. 그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인을 위한 거주시설을 디자인하며 ‘늙은 새들’, ‘새장 같은 노인의 집’을 떠올린다. 이국의 새들이 모인 새장 속에서 그는 아버지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단순한 사건 속에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글이었다.

 

*


또 흥미로운 전개로 눈을 사로잡은 이야기는 <방콕>이었는데, 남자와 여자의 대화로 구성된 한편의 이야기는 끊임없는 추론을 요구한다. 우리는 빠르게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이였는지, 그들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남자의 심리는 어떤지, 여자의 의중은 또 어떤지를 추론해내야 한다. 카페 옆자리 커플이 싸우는 얘기를 엿들으며 그들의 관계를 유추해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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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화는 서로를 도발하는 의미 없는 잡담이면서 은근한 감정이 실린 유혹이고, 과거에 대한 후회면서 현재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 복합적인 감정이 응축된 대화는 자세한 서술 없이 대사만으로 독자를 더욱 몰입하게 하고 흥미롭게 한다.


 

 

제 3장. 좋은 글이란



마지막 글인 <스톡홀름행 야간비행>은 굉장히 유쾌하면서도 기괴하다. 주인공은 자신의 논문을 인정받고 소설을 잡지에 싣기 위해 자신의 신체부위를 차례로 내어 놓는다. 새끼손가락, 고환, 팔, 귀를 대가로 그는 유명 잡지에 글을 게재하고 상을 얻어낸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눈앞의 장면을 상상해내고, 잘린 귀에서 귀지를 파달라고 부탁하는 태연한 모습은 상황을 심각하기보단 우스워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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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다보면 잡지에 실리는 글, 노벨상 수상작이 신체부위와 바꿀 만큼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오히려 표현을 틀에 맞춰 수정하고 신체부위를 주면 바꿀 수 있을 만큼 별거 아닌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좋은 글이란 대체 무엇일까?


가끔 글을 쓰곤 하는데 그때마다 좋은 글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이번 책을 신청한 이유도 문학잡지 편집자와 작가들이 선정한 글은 대체 어떤 글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비결을 알았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단연코 ‘아니요’다. 오히려 더 감이 안 잡힌다.


이렇게 다양한 글들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어떻게 잘 쓴 글이 단 하나의 모양이겠는가. 더 많은 글을 읽어보고 더 많은 글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솔직히 책을 읽으며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지 고민했다. 이해한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각 단편의 끝에 실린 작가들의 평을 읽으니 하나같이 내가 스쳐지나간 부분에 조명을 비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읽는 이마다 다르게 통과할 관문’이라는 표현에 맞게, 내가 이해한대로의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읽는데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많은 관점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글이야 말로 좋은 글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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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화보다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은 것을 눈앞에 보여주는 영상과 달리 소설은 내 마음대로 인물과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열다섯 편의 글을 읽으며 다양한 상상 속에 새로운 세계를 그려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작가들과 새로운 글,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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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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