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삶을 부르는 심규선의 숲에서 - 소로 小路

시내, 수피 樹皮,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소로 小路, 무지개의 끝, La Pluie, 밤의 정원
글 입력 2021.12.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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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두려워마시오

길 위에서는 누구나 혼자요

어디로 가든 그 얼마나 느리게 걷든

눈앞의 소로를 따라 묵묵히 그저 가시게

그대여 외로워마시오

모든 길들은 결국 다 이어져 있소

막다른 길 끊어진 길도 밟아가다 보면

먼 훗날 뒤돌아 볼 때

그대의 소로가 될 테니


심규선, <소로 小路> 중에서

 

 

 

길에 대한 단상



우리는 매일 길 위에 선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지도에 묻고, 때로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길’을 걷는다. 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지혜나 배움과 같은 것에도 길이 있어서 지혜를 찾고 배움을 얻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걸 ‘길’이라 부른다. 어찌 됐든 분명한 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매일 길 위에 선다는 것이다.

 

길 위에 삶이 있기도 하다.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길에 놓아둔 돌멩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듯, 우리는 걸음마다 골목마다 놓인 기억을 따라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는 - 정확히는 그렇게 느끼는 - 기적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망원동 거리를 걸었다’라는 문장에서 비롯된 일기나 ‘길을 걸었지’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두 개인 건, 길 위에서 꽤 많은 영감과 이야기가 태어난다는 걸 증명하는 바다.

 

길에 떨군 기억은 과거라는 시간대를 깨고 나와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2021년의 첫눈은 폭설이었다. 저녁부터 눈이 몰아쳤고 캄캄하고 추운 어둠을 오랫동안 내다보았다. 그 다음날 아침엔 뒷산에 올랐다. 보이는 거라곤 마지막 잎새라고 부를 것도 없는 앙상한 나무들과 모든 풍경을 새하얗게 덮은 무채색의 눈밭뿐이었는데, 산행 내내 한 줄의 문장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모두 죽고 남아있는 것이 몇 없는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삼삼오오 모인 어린이들이 경사진 직선 길을 썰매장 삼아 미끄러지고 있었다.

 

 

 

삶을 부르는 목소리, 심규선



길이 삶이라면, 나는 여러 번 태어나고 자랐을 것이다.

 

어릴 적 살던 아파트 단지의 구석으로 길 하나가 길게 나 있었다. 높은 나무가 줄지어 있어 언제나 그늘지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그 길을 나는 아지트라고 불렀다. 주민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만 아는 특별한 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길을 소중한 비밀처럼 다루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또는 학원으로 향하는 길이면 별다른 이유와 목적 없이 그곳으로 숨어 들었고 괜히 한 번씩 걸어보곤 했다. 아주 어렸을 적이라 희미한 기억이긴 해도 나는 그 길이 나를 자라게 했다는 걸 안다. 비밀의 내용이 무엇이든, 비밀을 간직한다는 건 알을 깨고 나올 생명을 품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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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를 걸으며 발견한 나의 소로(小路), ‘누군가가 밟아서 난 굽고 좁은 (심규선, <소로 小路>) 그 길 가운데에는 가수 심규선이 있었다. 가까워지는 수능을 앞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종일 자습실을 지켜야 했던 시절, 무겁고 갑갑한 공기를 뚫고 창을 통해 날아 들어온 노래.

 

그 노래가 창밖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을날의 기억을 여태껏 봄인 줄로 착각하지 않았을 테니. 그날을 시작으로 수능 이후의 남은 겨울까지 나를 붙들어준 건 삶이었다. 그는 삶을 들려주었으니 나는 그의 음악 전체를 삶이라고 부른다.

 

봄날 같은 가을 오후를 만들어주었던 앨범 [꽃그늘]을 통하여 여러 채도의 봄에 다녀왔고, ‘너의 존재 위에 무언가를 두지 (심규선, <너의 존재 위에>) 말라는 목소리와 ‘끝없이 바람과 후회가 밀려와도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는 새 (심규선, <데미안>)의 날갯짓을 닳도록 읊조리고 수없이 책상 구석에 옮겨 적음으로써 비로소 숨 쉴 수 있었다.

 

<안녕, 안녕>과 <어른이 되는 레시피>를 자주 들었던 스무 살의 한때는 설레는 기억으로 남아있으며, <연극이 끝나기 전에>를 내가 아는 사랑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사랑이라고 힘주어 말했던 것도 부끄럽지 않다.

 

심규선은 EP 앨범 [몸과 마음]을 발매하며 이렇게 말했다. ‘새 노래를 들려 드리는 제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똑같습니다. 노래들이 새처럼 날아가서 필요한 사람의 어깨에 앉기를 그래서 향기를 불어넣고 괴로운 몸과 마음을 일으켜주길 바랍니다.’

 

어떤 시기를 함께한 책이나 영화 또는 노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보존 능력을 자동으로 획득하게 된다. 추억과도 비슷한 원리다. 삶은 분절된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써 이어지는 커다란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노래들은 여전히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가 몸과 마음을 다해 보낸 새들은 그렇게 소로에 머문다. 작고 매우 좁다란 수많은 소로의 곁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소로 小路,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있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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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발매된 심규선의 [소로 小路]는 숲과 시내 그리고 밤의 정원을 거닐며 발견한 ‘소로’로 이야기 지은 앨범이다. 2번과 7번 트랙인 <수피 樹皮>와 <밤의 정원>을 타이틀곡으로 삼고 <시내>,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소로 小路>, <무지개의 끝>, 그리고 일곱 곡 각각의 인스트루멘탈 버전 곡까지 총 열네 곡으로 구성한 앨범이다. 열네 곡을 모두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한 시간가량 심규선의 숲을 돌며 곳곳에 돌멩이를 놓아두게 될 테니. 음악을 매개로 언제든 이 숲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조각들을 간직하게 될 테니.

 

첫 번째 트랙 <시내>는 ‘시내’다. 흐른다. ‘깊은 밤중에 내가 갑자기 숨 못 쉴 때 (심규선, <시내>) 로 입을 떼는 화자에게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숨을 불어넣듯, 흐른다. 흐르면서 나아간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시선은 가로막히며 약해지는 물길에서 터져 오르는 샘물로, 샘물에서 바다로 이동한다. 중요한 건 흐를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며 ‘옳은 순간은 온다 (심규선, <시내>) 라는 노랫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심규선의 음악은, 주문은 주문에 대한 믿음만큼의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수피 樹皮>는 바람이 숲을 메아리치듯 호흡하는 목소리로 문을 연다. 나뭇결이 느껴지는 기타 소리, 공기를 가로지르는 관악기 소리, 공간감을 넓히는 현악기 소리는 어우러져 생명의 고귀함을 말한다. 주된 이미지는 숲과 나무다. 나무의 껍질을 가리키는 단어 ‘수피’라는 제목에서 기인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움직임’이다. 숲과 나무는 선율과 노랫말을 타고 움직인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뭇가지는 매 순간 아주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수천수만 개의 잎사귀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숲은 단 한순간도 침묵하지 않는다.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디서나 목소리는 돋아난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소리를 낸다.

 

<언젠가 우리는 틀림없이 죽어요>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오월의 청보리와 바람의 춤’, ‘수천 송이 해바라기의 들판’, ‘소나기 끝에 나란히 뜬 무지개’는 비유하지 않고 풍경과 장면으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적인 그림들이 축제를 벌이듯 이어지고 나면 음악이 놓아준 ‘길’을 통하여 죽음의 세계로 건너 갔다 온 듯한 기분에 잠긴다. 장면과 장면을 걸으며 모든 삶은 죽음으로 향한다는 말을 생각한다.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더 이상 불쾌하고 두렵지 만은 않다. 이 음악 속에 있는 순간만큼은 말이다. 또한 아주 놀랍게도, 죽음을 생각하고 나면 여기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노랫말처럼 ‘눈이 부실만큼 누 (심규선,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리자고 말한다. ‘살아있음을요 (심규선,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소로 小路>는 앨범에 수록된 일곱 곡을 관통해 엮는 곡이다. 나아가 ‘모든 길들은 다 이어져 있 (심규선, <소로 小路>) 듯 ‘길’이라는 소재를 가운데 두고 전작을 곁들여 감상해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피어나> 속 어둡고 후미진 ‘골목’에서 피어난 작고 외로운 꽃씨는, ‘명예도 없고 저만치 쌓아 올릴 부도 없 (심규선, <음악가의 연인>) 지만 ‘나’의 ‘길’인 길을 걷는다. ‘나와 함께 길도 없는 밤을 헤매어주 (심규선, <음악가의 연인>) 는 너에 대한 음악을 쓰기도 한다. 어떤 날은 ‘낯선 거리 아무도 너를 모르는 길 위 (심규선, <도미노>) 에서 도미노처럼 흔들리고 비틀대며 휘청이고 쓰러진다. 작고 외로운 꽃씨는 오랜 길을 걸어 소로에 도착한다.

 

오래도록 일관된 점은 삶을 부른다는 것이다. 삶을 ‘늘 이길 수는 없다 해도 (심규선, <생존약속 生存約束>)’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심규선, <섬광 閃光>) 누구도 너를 꺾을 수 없다는 메시지, 그리고 ‘밑가지 채 꺾어 버려도 향기가 먼저 마중 (심규선, <야래향 (夜來香)>) 나가는 생명력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관점은 심규선의 모든 음악을 꿰뚫는 지점이다. 고로 살아 있자고, 피어나자고 말한다. 삶을 끝끝내 불러오고 글과 음악으로 쓰고 부르며 생존을 고고하게 때론 절박하고 집요하게 약속한다.

 

이처럼 나와 심규선은 이어진 길 위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 것이다. 유성이 떨어지는 순간처럼 쉽게 오지 않고 또 아주 찰나였을지는 몰라도 음악을 통하여 그와 연결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소개한 네 곡 외에도 그리운 존재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곡 <무지개의 끝>과 ‘빗줄기’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단어를 제목으로 삼은 곡, 나의 자장가 <밤의 정원> 또한 추천한다.

 

 

 

언니에게



앨범을 다 듣고 나면 황폐해진 마음에도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다. 안개와 진흙으로 가려져 있던, 그러나 본래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이 분명한 길을 발견한다. 그 길을 따라가면 시내를 발견한다. 어떤 하루는 빗줄기가 바닥을 적시고 비가 갠 뒤엔 지평선 끝의 무지개를 만나기도 한다. 어떤 밤은 악몽 속에서 허우적대고 어떤 밤은 정원의 풀밭에 등을 대고서 숨을 쉰다.

 

이것이 나와 당신들의 소로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루어진 것이 없다. 꽃 한 송이와 나무 한 그루도, 오래 쌓인 낙엽을 쓸어내고 잔가지에 긁히면서도 앞으로 또 앞으로 걸음을 내딛어서 만든 이 길도. 그리고 언젠가는 밟아 온 길을 따라 혼자서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앨범 소개



심규선 <수피 樹皮> MV

 

 

 

[소로 小路] 앨범 소개글 중에서

 

거칠어 보이지만 늘 생각보다 부드러운 수피 樹皮는

수백수천 번 겉이 터지고 벗겨지며

오랜 세월 스스로를 이루어 온 흔적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겨우겨우 이루어 온 지금의 자신일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심지어 당신 자신조차도

결코 스스로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대해서는 안 됩니다.

 

 

Track List


1 _ 시내 

2 _ 수피 樹皮

3 _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4 _ 소로 小路

5 _ 무지개의 끝

6 _ La Pluie

7 _ 밤의 정원

8 _ 시내 (inst.)

9 _ 수피 樹皮 (inst.)

10 _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inst.)

11 _ 소로 小路 (inst.)

12 _ 무지개의 끝 (inst.)

13 _ La Pluie (inst.)

14 _ 밤의 정원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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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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