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쁜 교육'의 시선 [영화]

몸을 담는 카메라, 소비되는 것을 담다
글 입력 2021.12.0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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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쁜 교육>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2004년 작품으로 네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을 보여준다고 하여 영화의 내용마저 달콤하진 않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으로 슬픔을 곱씹는 순애보는 더더욱 아니다. 영화가 드러내는 감정이 그만큼 강렬한 것은 분명하나, 이 감정은 그저 쓰다. 사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뜨거웠던 감정이 타고 남은 잔재일 것이다. 타오르기 이전의 상태가 순수하였든, 비뚤어졌든지 말이다.

 

과거가 어떠했든 이제 욕망만이 남아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를 뜨겁고 노골적인 시선으로 응시하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섬뜩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희생해야 할 것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소비한다. 그중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영화 속 인물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이그나시오'는 이런 소비와 대상화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소년 시절을 시작으로 영화의 마지막까지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비된다.

 

이런 소비의 모습은 우선 남성의 육체를 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구체화된다. 다이빙하며 수영을 즐기는 소년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소년들의 벗은 몸은 영화 속 슬로우 모션으로 나타난다. 세스 고든 감독이 연출한 <베이워치 : SOS 해상구조대>(2017) 속 금발 미녀 캐릭터인 'C.J 파커'가 그려지는 모습처럼 말이다.

 

오후의 햇살 속 소년들은 웃음소리를 내며 물장구를 친다. 카메라는 이 역동적인 모습을 빛이 반사되는 것처럼, 느린 속도로 담아 간다. 더욱이 <나쁜 교육>에서 소년들을 욕망하는 시선은 일반적인 상업 영화처럼 단순하지 않다.

 

이 시선의 주인은 눈요기를 위한 관객이 아니다. 소년들의 문학 선생이자 성직자인 '마놀로 신부'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옆에서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아름다운 소년 '이그나시오'에게 욕정하고 만다. 도망치던 이그나시오가 넘어지자 그의 이마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르며 화면이 반으로 갈라지는 장면 역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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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린 소년뿐 아니라 성인 남성 역시 성적인 대상으로서 묘사한다. 여기서도 이그나시오는 시선의 객체로서 등장한다. 젊은 영화 감독 '엔리케'는 시나리오와 함께 자신을 찾아온 자신의 첫사랑 이그나시오를 마주한다. 엔리케는 그들의 유년기를 묘사한 이그나시오의 시나리오 '방문'에 매력을 느끼고 영화화를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엔리케는 여성 캐릭터 '자하라'로 자신을 캐스팅하라는 이그나시오의 모습과 둘만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대의 모습으로부터 위화감을 느낀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의심하는 와중에도 엔리케는 이그나시오를 향한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이그나시오의 벗은 몸을 훔쳐보는 엔리케의 시선이 이를 보여준다. 마놀로 신부가 어린 소년들의 벗은 몸을 바라봤듯 말이다.

 

욕망과 의심의 혼재 속 엔리케는 이그나시오의 고향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그나시오가 이미 3년 전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옛사랑의 글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접근한 이가 이그나시오의 동생 '후안'임을 눈치챈다. 하지만 엔리케는 이를 모르는 척, 이그나시오를 연기하는 후안과 계속 작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하며 영화 캐스팅을 빌미로 후안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엔리케는 욕망을 위해 죽은 첫사랑의 인격을 소비한다.

 

더해 이그나시오는 다시 한번 소비된다. 엔리케와 관계를 맺은 이그나시오의 동생 후안이 바로 소비의 주체이다. 죽은 형을 연기 중인 후안은 엔리케의 영화 속에서 이그나시오를 형상화한 여성 캐릭터 '자하라'를 연기한다. 그리고 영화 속 자신의 비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촬영을 마무리한다. 후안은 촬영이 끝난 후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이 속죄의 눈물은 이그나시오라는 인물이 다시 한번 소비되었음을 확정한다. 더욱이 줄곧 소비되어 온 이그나시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그나시오를 최초로 욕망한 마놀로 신부가 나타나 엔리케에게 진실을 밝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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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놀로 신부는 이그나시오가 죽기 전, 성전환자가 된 이그나시오로부터 과거의 사건을 빌미로 거액을 달라는 협박을 당한 일과 이그나시오의 집에서 만난 후안과 육체적 관계를 맺었음을 알린다. 또한 이그나시오를 살해한 이가 바로 자신과 후안이라는 것을 엔리케에게 알린다. 이를 통해 다시금 이그나시오는 소비되고 만다. 마놀로 신부는 후안을 자신의 옆에 두고자 진실을 밝히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엔리케는 마놀로 신부와 후안을 벗어나 자리를 뜬다. 그리고 그날 밤, 엔리케는 마지막 남은 이그나시오의 편지를 후안에게 건네받는다.

 

이는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엔리케에게 보내려던 미완의 편지이다. 이야기의 끝에서야 엔리케는 편지를 읽으며 욕망이 아닌 감정을 마주한다. "사랑하는 엔리케에게(Querido Enruque)", 편지에 온전히 적힌 유일한 말이다. 엔리케의 이름을 부른 이그나시오는 이후 단 하나의 문장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런 첫사랑의 편지를 읽은 후 엔리케는 그저 벽에 기대어 서 있을 뿐이다. 결국 이그나시오는 그저 이들에게 소비된 채로 영원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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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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