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휴학하고 떠난 제주에서 있었던 일 [여행]

24살의 끝자락에서 23살 제주의 기억을 되새기다.
글 입력 2021.12.0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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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가기로 한 유럽여행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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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유럽에 갔어야 했다. 수능을 앞두고 작가 청춘유리의 여행에세이를 읽었다. 아름다운 외국의 풍경, 낯선 곳에서 만난 인연,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 성인이 되면 떠날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작년, 휴학을 결정하고 이때다 싶었다. 휴학시기가 겹친 동기와 새벽 내내 어디로 갈지 열띤 토론을 나누고 부지런히 계획을 정했다. 이 모든 것이 코로나때문에 물거품이 될지 그때는 몰랐었다.


유럽여행부터 영화제 자원봉사, 교환학생까지 계획했던 것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꿈꾸던 휴학라이프는 사라진 지 오래. 2020년이 ‘23살, 코로나’로 기억될 지경이었다. 휴학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낙심할 시간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영화 워크샵에 참여했다. 사색을 즐기고 마음껏 취미생활도 누렸지만, 자꾸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맘때의 나는 자꾸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기분이 우울한 건 아니지만, 마냥 좋지도 않았다.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걸까. 이렇다 할 핑계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공기처럼 있던 곳이 지겨웠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떠나기로 결정했다. 둘이서 가려던 유럽여행이 혼자 가는 제주도 여행이 됐어도 아무렴 좋았다. ‘혼자 여행이라니! 휴학할 때 가지 언제 가겠어?’

 

 

 

혼자가 익숙한 사람



 

‘이왕 가는 거 길면 좋겠다.’

‘그래. 기간은 2주!’

‘그럼, 그동안 혼자서도 재밌게 보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그렇게 나는 제주도로 떠났다. 청춘의 상징이자, 버킷리스트의 필수 요소인 ‘혼자 여행가기’. 이 체크리스트를 이룬 것만으로도 여행의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혼자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친구들과 논 후에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뭐든 경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많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이를 맞춰줄 동지를 찾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가피하게 시작한 혼자놀기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이런 생활에 금세 익숙해졌다. 아니, 오히려 편한 점도 많았다.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루를 채울 수 있었다. 행동의 방향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었다. 시작이 어렵지 이제는 혼밥, 혼영, 혼카, 혼쇼까지 혼자서 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게 힘들 정도다. 혼자 여행에 스스럼없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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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혼자 탄 비행기에 긴장도 됐지만, 창가 석에 앉아 육지를 떠난 기분에 취하기 바빴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간 식당에서도 친구와의 통화로 적적한 기분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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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항구가 있어서 바다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어두워지는 하늘과 밝아지는 등대의 불빛을 보면서 제주도에 있음을 실감했다. 정처없이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혼자 있다가 무슨 일어나는 거 아니야?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있지.' 앞으로 2주 동안 잘 보낼 수 있을까 더럭 겁이 났다. 갑자기 2주라는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괜히 혼자 왔나 후회가 밀려왔다. 집에 빨리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일정을 변경하기 위해 항공표를 알아봤다. 아무래도 2주는 성급한 결정이었던 것 같았다. 돌아가는 표를 앞당겨 찾아봤지만, 마땅한 표가 없었다. (사실, 너무 비쌌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라며 스스로 다독였다. 고민을 덮어두고 다음 날 일정에 집중했다.

 

 

 

나 혼자 LP바



앞서 기고한 글에서 나의 취미를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LP를 수집하는 만큼, LP바에 가는 것을 즐긴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곳의 레코드가게나 LP바 가기를 필수로 한다.) 혼자놀기에 자신 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죽어도 못하는 게 있다.

 

그 중, 하나가 LP바에 가는 거다. 왠지 사연있는 사람같고 청승맞아 보일까 봐 감히 도전하지 못한 영역이다. LP바보다는 혼자 술을 마시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제주도고 여행이니 왠지 모를 도전정신이 앞섰다. 검색해본 결과, LP바는 아니었지만 한 뮤직바가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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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여서 다음 날 바로 방문했다. 뻘쭘한 나머지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들어갔다. 다행히, 소수로 음악을 즐기기 적합한 곳이었다. 바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따뜻한 조명과 빈티지한 분위기가 혼자 온 어색함을 달래줬다. 구경하느라 바쁜 와중에, 멋진 수염을 한 사장님이 ‘오늘 첫 손님이네요. 신청곡 마음껏 보내세요.’라며 선처를 베풀었다. 그 후, 신청곡 10곡을 보냈고 맛있는 하이볼을 즐기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 그만큼의 용기를 가진 사람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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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귀덕골방’. 귀덕에 위치한 뮤직바다. ‘골방’은 큰방의 딸린 작은 방으로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만든 깊은 밀실을 뜻한다. 이날만큼은 나에게 도피처가 되었다. 무작정 떠나온 곳에서 약한 나를 수시로 마주했다. 괜히 친구랑 통화하면서 혼자 여행의 어색함을 모면하고 이미 본 인스타그램을 정독하며 오갈데 없는 시선을 거뒀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의식할 필요없이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아무 걱정없이 술을 들이켰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음에 큰 위안을 얻은 밤이었다. 다시금, 용기를 얻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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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첫 도전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서귀포로 이동해서 ‘The Rumours’라는 LP바를 방문했다. 그날은 비가 오던 날이었다. 우연히 지나친 곳에서 음악 소리에 이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세상이 참 좁다는 걸 다시 느낀 날이기도 했다. (우연히 옆에 착석한 분이 시나리오 작가였고 그분이 우리 학과에서 강의했던 교수님이였다.)

 

혼자 온 내가 신경 쓰였는지 사장님은 이런저런 말로 얘기를 이어갔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이랑 대화하니 여행에 온 게 실감이 나면서 이런 나의 모습이 괜히 멋있게 느껴졌다. 사장님의 추천으로 각종 맛집과 명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그날 난 칵테일 3잔을 연거푸 마셨다.

 

 

 

혼자 여행의 묘미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역시 LP바에 갔다. 이쯤 되면 LP바투어를 하러 왔나 싶을 것이다. 제주도가 아니면 더 이상 혼자 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LP바만 간 건 아니다. 바다 앞에서 혼자 피크닉도 즐기고 해안공원으로 출사도 갔다. 발이 이끄는 대로 정말 본능에 충실한 여정이었다. 버스를 타다 바다가 보이면 무작정 내렸다. 타려던 버스가 떠나더라도 버스킹은 놓칠 수 없었다. 혼자 벤치에서 밥을 먹다 만난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소소하지만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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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대로 지냈다면, 몇 년 내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2주 사이에 몽땅 생긴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운명처럼 누군가를 만나 여행을 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보다 더 특별한 나날을 보냈음에 만족한다.

 

여행이 가진 힘이 그러하다. 여행이라는 근사한 핑계로 그동안 망설였던 일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다. 절대 못할 것 같았던 혼술을 하고 처음 본 사람과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맺는 것, 그런 과정에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렇게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모여 일상을 빛내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베푼다. 주저했던 일을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닐 때가 많다. 이를 발판으로 다른 것에도 도전하다 보면 어느덧 나의 세계도 점점 넓어질 것이다.


혼자 여행의 단점도 분명 존재한다. 나 또한 혼자 돌아다니면서 어색한 순간들도 많았다. 메뉴 선정의 한계, 멋진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이의 부재, 안전과 금전적인 문제 등. 혼자라는 편안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되는 부분이다. 이를 포기하기 어렵다면 혼자 여행의 묘미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여행을 주저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짧디짧은 인생, 한 번 도전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심심하면 심심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그 순간을 즐겨보자. 나의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그동안 외면했던 생각과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홀로 여행은 결국 '나'를 위한 여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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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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