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믿음과 착각 그 어딘가: 베네데타 [영화]

영화 '베네데타' 속 신앙
글 입력 2021.12.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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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중세, 수녀원, 레즈비언, 믿음, 신앙, 모순

 

 

영화는 16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어린 베네데타는 수녀원에 입회하러 길을 떠났다. 잠시 쉬어가려던 찰나 도적들이 나타나 그들에게 금전을 요구한다. 그의 어머니의 목걸이를 빼앗아 가며 킬킬대는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보호자들은 당황하지만, 베네데타는 눈 깜짝하지 않으며 그들을 저지한다. 빼앗은 목걸이를 돌려주라고. 그러지 않으면 성모 마리아가 용서치 않으리라고.

 

당차다며 낄낄대던 남자는 순간 얼굴에 새똥을 맞는다. 해를 가할 듯한 도적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우연이라고 넘기기 어려운 일은 수녀원 입성 후에 다시 생긴다. 한밤중, 성모 마리아 조각상 앞에 앉아 기도하던 베네데타. 갑자기 지지대가 부서지고, 커다란 조각상이 베네데타의 몸을 바닥에 짓눌렀다. 놀랍게도 베네데타는 어느 한 곳도 다치지 않았다.

 

되려 조각상의 가슴을 입에 머금는, 신앙을 가진 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보였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생각을 제고하게 된다. 믿는 자들이 말하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자에게서 성스러운 흔적이 보였다. 그럼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을 텐가. 믿음 일부를 취한다면, 그것도 믿음이라고 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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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자란 베네데타. 간만에 그의 보호자들이 찾아오고, 성스러운 자리가 마련되었다. 풍성한 포도주, 빵, 음식들은 수녀원을 관장하는 원장 수녀가 가져온 결과물이다. 수녀원의 아이들은 먹고, 자고, 입히고, 씻기는 비용을 입회 전에 낸다. 그것도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 원장 수녀는 유려한 말솜씨로 협상금을 높여 원하는 액수를 받아냈다. 검소와 절약을 중시하는 교리와 정반대로 말이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수녀원 내부 사람들에게 신임받는 존재이면서 가장 세속적이니까.

 

오묘한 줄타기가 시작된 건 바톨로메아의 등장 때문이다.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도망쳐 나와 급히 수녀원 앞에 서 있던 베네데타 앞에 몸을 숙였다. 마치 성스러운 존재에게 자신의 구원을 갈구하는 몸짓으로. 베네데타의 부탁으로 그의 입회금을 보호자들이 대신 내주고, 바톨로메아는 베네데타와 가까워지려 한다. 천덕스러움과 무례함 사이를 넘나들면서.

 

여성끼리 입을 맞추고, 벗은 몸을 보이는 것은 모두 금기였다. 하지만 바톨로메아는 수녀원의 규칙, 즉 신앙이나 교리엔 관심이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베네데타는 어느 날 바톨로메아에게 벌을 내린다. 끓는 물에 손을 넣어 실패를 모두 건져내라고. 폭력적인 명령에도 바톨로메아는 눈을 부라릴 뿐, 베네데타를 따랐다. 고난과 역경도 신의 뜻이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후, 베네데타는 심한 고통을 겪는다. 의사가 딱히 처방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결국 그를 도와줄 수녀를 구했는데, 유일한 지원자가 바톨로메아였다. 반투명 커튼을 사이에 두고 한방을 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점점 더 깊어졌다. 이 무렵, 베네데타는 가장 신과 가까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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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후에 부활했다는 예수. 양손과 발, 그리고 가시면류관에 찔린 이마의 상처. 이 성흔과 똑 닮은 상처가 생긴 베네데타. 더불어 가장 가까이 지낸 바톨로메이아의 배신은 예수의 제자 유다를 떠올리게 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더 갑작스러운 부활까지도. 베네데타와 적대 관계인 크리스티나, 그의 어머니 펠리시타는 그를 의심한다. 특히 크리스티나는 유리 조각으로 상처를 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의 믿음에 저항한다. 하지만 다른 수녀들은 한 번 생긴 믿음을 바꾸지 않는다. 베네데타를 완벽히 신봉한 사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펠리시타가 이어온 원장수녀 자리는 베네데타에게 넘어간다. 확신에 찬 얼굴이나 꿋꿋한 신념 때문인지 베네데타의 행보는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동시에 바톨로메아와 보내는 시간은 과감해졌다.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는 행동에 이르렀다. 다만 영화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두 갈래로 나뉜 모순을 보여주었을 뿐.

 

베네데타는 정말 신과 소통한 적이 있었을까. 신과 만난 장면들은 현실적인 배경이면서도 어설펐다. 베네데타가 ‘순결’을 빼앗기는 위협에 처하고, 기다렸다는 듯 신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몇 번의 칼질로 베네데타를 구원하고, 베네데타는 기뻐하던 뜬금없는 조우와 분위기. 그럴싸하면서도 허술한 것이 마치 우리가 매일 밤 꾸는 꿈 같았다. 신의 얼굴이 바뀌며 혼란을 불러오는 건 악몽을 꿀 때의 모습 같았고.

 

그럼 베네데타는 페샤를 상대로 거짓말한 사기꾼일까.

 

그렇다고, 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기꾼이라고 판단한 건 교황이었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죄목이고, 성스럽다고 여겨지는 물체를 훼손한 건 신성모독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성경에서 금지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전의 모습들-성흔, 예지, 부활-도 부정할 수 있는가? 게다가 바톨로메아에게 고해하게 만들겠다며 성고문을 한 것은, 신앙을 가진 이로서 허락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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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깊으면 깊을수록 정확한 자격과 조건을 요구한다. 인간이면서 어느 하나 오차를 넘지 않는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준을 넘은 자는 ‘지옥에 갈, 회개가 필요한, 사탄의 말에 현혹된, 그래서 구원해줘야 할’ 사람이고, 그 선을 넘지 않은 자는 ‘천국에 갈, 구원받은,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이 된다.

 

수녀원에서 거의 일평생을 보낸 베네데타와 시궁창을 겪은 바톨로메아, 고고한 펠리시타, 권위적인 교황. 이들 중 누가 더 깨끗하고, 올바르고, 믿음이 넘치고, 따르는 이가 많은가. 결말에 가서는 모두 비슷했다.

 

개개인을 하나의 방식에 밀어 넣으려는 태도는 언제봐도 폭력적이다. 그렇게 하나의 것에 골몰한 사람들-교황, 펠리시타-은 페샤에 역병을 옮겨온 자들이기도 했다. 베네데타의 말대로 성문을 닫았더라면 페샤에 퍼지지 않았을 흑사병.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있던 인물들은 바닥으로 끌어내려지고, 그들이 처벌한 베네데타는 수호자로 추앙받았다.

 

베네데타가 신앙심이 있었는지, 그가 한 말이 사실이었는지, 성흔을 꾸며낸 건 아닌지, 개인의 사실확인은 그다지 의미 없다고 본다.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이 지닌 믿음의 시작점과 방향을 살피는 게 아닐까. ‘내가 옳다’는 오만함으로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는 사람들을 틀렸다고 재단하지 않았는가. 그때마다 한 번쯤 되돌아볼 만하다. 오랫동안 이어온 믿음, 그 믿음에서 비롯된 엄격한 규율은 자신과 다른 타인을 부정하기 적합한 수단일지 모른다고.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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