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입에서 시작해 무대로 계속되는 이야기 [공연]

글 입력 2021.12.0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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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우스피스>를 이야기하지만, 극 초반을 제외하고는

공개된 시놉시스 이상의 내용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분위기의 흐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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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다시 정확하게 시작해 보죠. 한 여자가 무대 위에서 말합니다.


 

첫 장면. 이것은 이야기의 시작이고, 그래서 더없이 중요하다. 이상적인 첫 장면은 이야기의 설정을, 그 세계 전체를 제시해야 한다. (...)

 

연극 <마우스피스> 중 리비의 첫 작법 독백

 

 

관객에게 시작부터 자신이 아는 작법 정보를 전달한 중년의 여성은, 무대 뒤편에 경사 길을 올라가더니 한순간 연극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됩니다. 옆에는 한 소년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자가 언덕 위 절벽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서 조금 두려워하는 감정이 전해집니다. 소년이 흘깃흘깃 혼자 말하고 있는 그녀의 움직임을 봅니다.


여자는 불안하게 절벽 위에서 계속 혼잣말을 합니다. 절벽의 높이를 코끼리 몇 마리가 들어갈 수 있을지로 계산해 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납니다. 그녀는 왜 이곳에 온 걸까요. 소년은 자신의 그림에 집중하려 하지만, 자꾸만 옆에 불안하게 서 있는 여자가 신경 쓰입니다. 저러다가 발을 헛디디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소년이 그녀를 바라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다시 무대로 돌아온 연극 <마우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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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한국 초연에 이어 올해 겨울에 연극 <마우스피스>가 다시 무대에 올랐습니다. 2018년 12월에 영국 에든버러에서 초연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초연 무대를 했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 오직 영국, 터키, 호주, 헝가리 그리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만이 이 섬세하고 강렬한 연극 <마우스피스>를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100분은 2인의 대화, 음악, 조명 그리고 극에서 특별하게 사용되는 자막으로 채워집니다. 자막? 무대장치에 큰 변화 없이 극을 진행하기 위해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는 정도로 자막이 활용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연극에서 자막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사용됩니다. 중요하다고 표현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극의 시작을 열었던 여자 '리비'가 극작가였기 때문이죠. 그녀는 글을 씁니다.


생생하고 인상적인 경험을 하면 먼저 펜과 종이를 찾아 쓰면서 정리합니다.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죠. 리비가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쓸 때 관객들은 그녀가 쓰고 있는 내용을 자막으로 직접 확인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 어떤 문체와 단어 표현을 선택하는지도 말입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리비 옆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소년 '데클란'입니다. 그의 강한 단어 선택, 투박한 감정 표현, 자신을 향한 관심에 대한 직설적인 반응 등으로, 거친 말투와 달리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고 관계 맺고 싶어 하는 데클란의 여린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그림과 사랑하는 동생 '시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소중한 걸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그러고 싶어 하는 소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인물 '리비'와 '데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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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관련이 깊은 두 사람이 한 공간(언덕)에 있다가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첫 만남에서 데클란의 그림을 보게 된 리비는 그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고, 그가 한 행동과 말을 곱씹으며 그를 다시 만날 기회를 찾습니다. 그녀가 본 데클란의 그림 속 여자아이처럼 두 사람의 만남을 시작한 건, 어린 동생 시안 말고는 진심으로 대화할 상대가 없던 그에게 손을 뻗은 리비였습니다.

 

시작은 리비였지만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 가족, 어려움을 솔직하게 나누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상대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기도 합니다. 리비는 데클란이 좋아할 그림들을 보여주고, 데클란은 리비가 듣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D : 진짜 저기 저 작품들이 떠올랐어요? 그때 내 그림 보고?

L : 정말로. 너도 마음에 들었지, 그치?

 

L : 나 듣는 거 좋아해. 잘 들었어. 난 네가 용감하다고 생각해.

D : 이런 얘기 많아요. 혹시 듣고 싶으면.


 

연극은 중간중간 리비가 독백으로 전달하는 작법론에 따라 완벽한 순서로 진행됩니다. 주요 등장인물이 만나고, 중요한 결정을 하고, 이야기에 전환점이 되는 중간 지점을 지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관심과 호기심으로 만남을 시작했던 인물의 감정은 점차 깊어지고 복잡해집니다. 관계의 주도권은 나이와 세상 경험이 더 많고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민 리비가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말이죠. 하지만 관계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주도권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글, 한 사람은 그림이 세상과 소통하는 주된 도구인데, 재밌는 건 두 사람은 음악 얘기를 하며 서로에게 더 가까워집니다. 밴드 Hole의 노래를 들으며 처음 만난 언덕에서 춤추기도 하고요. 자신들을 Hole의 보컬 '코트니 러브'와 R.E.M의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대화의 소재로 글도 그림도 아닌 음악을 선택한 건 왠지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음악 분야에서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우위에 있지 않으니까요.

 

 

 

조명이 켜져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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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우스피스>를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싱긋 웃으며 객석에 들어간다면, 아마 나올 때는 눈이 동그래지거나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는 모습일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며 강렬하게 드러나는 인물들의 감정은 때로 보는 사람의 마음도 무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리비와 데클란이 서로를 알아가며 나누는 대화들이 각자의 기억 속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남게 된 것 같습니다.


리비에게 데클란의 이야기는 극작가'였다고' 혹은 이제는 어떤 표현으로도 본인을 설명할 수 없던 그녀가, 다시 극작가라는 수식어를 본인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동생 시안 말고는 자신의 그림을 가치 있게 보지 않는다고 말하던 데클란은 리비의 말에 위로받고 생전에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리비를 만나고 완성한 그림 <마우스피스>는 그가 처음 이름 붙인 작품이 되었고, 이는 리비가 완성한 극본의 제목이 됩니다. 또 관객이 보고 있는 연극의 제목이죠. 데클란의 입을 통해 리비에게 전달된 그의 인생은 리비의 글이 되었고, 연극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됩니다.

 

막을 내리고 무대 위 배우들이 떠나고 나면 리비와 데클란의 다음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극의 시작을 연 리비가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연극을 보고 나니, 데클란의 이야기로 그녀가 극본을 썼듯, 리비가 들려준 이야기를 데클란이 그림으로 옮긴다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해집니다.

 

데클란이 그린 리비의 삶을 담은 그림은 누구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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