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을 진정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떤 불멸성을 얻게 된다 [영화]

글 입력 2021.11.3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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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The Peggy Guggenheim Collction)

  

 

전 세계에 구겐하임 미술관은 도시 세 곳에 위치해 있다. 보편적으로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나선형 모양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쉽다. 현재 건립 중인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를 제외하고서 스페인 빌바오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바로 이 두 곳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뉴욕이나 베네치아, 또는 빌바오를 여행했다면 한 번쯤은 가보아야 할 여행지 목록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적혀있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미술을 잘 모르더라도 구겐하임이란 이름은 생소하게나마 스쳐 지나듯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Peggy Guggenheim: Art Addict, 2015)"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The Peggy Guggenheim Collection)을 세운 페기(Peggy Guggenheim, 1898-1979)의 다이내믹했던 인생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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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Lisa Immordino Vreeland)가 페기의 마지막 인터뷰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토록 흥미로운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페기와 페기의 전기 작가인 재클린 웰드(Jacqueline Bograd Weld)의 인터뷰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영화 첫 장면에서 페기는 "본인의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을 발굴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영화를 관통하며 비춰지는 페기의 삶은 도입부에 던진 대답 그 이상의 예술적 가치를 향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한 인물의 기구한 가정사와 마냥 순탄하지 않았던 인물 관계를 읊어준다. 페기는 타이타닉 침몰 사고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유년 시절 이후에도 페기는 첫 번째로 결혼한 남편의 가정폭력과 이혼, 출산 사고로 사망한 언니 베니타, 여동생 헤이즐의 아이들 사망, 딸 페긴의 자살, 예술가 애인의 여성편력, 예술가 남편의 외도 등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한 인간이 겪어내기에 결코 가볍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앞서 나열된 비극적인 이슈들은 페기가 점차 예술을 더 사랑하고 몰입하게 만든 발판에 불과한 듯했다. 녹음테이프 속 흘러나오는 페기의 목소리는 대담하며 또 솔직했다.

 

현대미술의 중심지는 시대의 필연적인 흐름에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주요 흐름에는 항상 페기가 존재했다. 페기는 출생지인 뉴욕을 떠나 1921년부터 1938년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당시 파리는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도시였으며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음악, 발레, 연극 등에 속한 많은 예술가가 파리로 모여들었다. 뒤샹(Marcel Duchamp)과 만 레이(Man Ray),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장 콕토(Jean Cocteau), 페르낭 레제(Joseph Fernand Leger) 등 페기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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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가 촬영한 페기 구겐하임

 

 

1차 대전 이후에 생겨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예술사조가 전개되던 시기에 페기는 파리에서 보헤미안과 같은 삶을 살아갔다. 많은 예술가와 교류를 이어나갔던 페기는 특히 뒤샹과 잘 알고 지내며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예술가들과 가까운 사이로 지내며 페기는 그들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술가와의 교류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수집해 나가던 페기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동하게 된다.

 

1938년 영국에서 페기는 자신의 가장 첫 번째 갤러리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 Gallery)'을 열게 된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도 페기의 런던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열게 된다. 당시 이곳에서 페기는 수많은 전시를 열었고 현대미술에 낯설었던 영국의 인식을 바꾸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갤러리의 영업과 운영은 쉽지 않았다. 작품을 많이 팔지 못하고 고액의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페기는 일 년 반 만에 '구겐하임 죈'을 닫게 된다.

 

많은 돈을 쓰려면 차라리 현대미술관을 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페기는 엄청난 투자 비용으로 미술관을 짓고자 했다. 개장할 미술관의 전시에 참여할 주요 명단에는 뒤샹과 피카소(Pablo Picasso), 호안 미로(Joan Miro),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몬드리안(Pie Mondrian),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자코메티(Giovanni Giacometti), 이브 탕기(Yves Tanguy) 등 너무나도 익숙하고 유명한 예술가들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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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기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페기는 결국 미술관을 짓지 못하고 런던을 떠나 다시 파리로 이동하게 된다. 당시 자유로운 예술가들과 유대인 딜러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나치였다. 화가들과 아트 딜러들은 독일군을 피해 앞다퉈 작품을 팔아치웠으며 페기는 좋은 가격에 수많은 작품을 사들일 수 있었다. 수집하는 안목과 취향을 정립해나간 페기는 예술가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페기는 당시 큐비즘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았음에도 큐비즘 작품을 사들이는 등 자신이 원하는 작품들을 수집해나갔다.

 

전쟁 중에 페기는 수집했던 많은 작품들을 루브르 박물관에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부탁했지만, 당시 루브르는 페기의 소장품들이 보존할 가치가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페기는 침대보와 이불 사이에 작품을 넣어 자신의 소장품들과 함께 미국으로 넘어온다. 심지어 유럽을 탈출하려고 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미국행을 돕게 된다. 예술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왔으며 1942년부터 1947년까지 뉴욕에서 지낸 페기는 뉴욕 57번가에 '금세기 미술화랑(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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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의 갤러리는 뉴욕 최초의 국제적인 갤러리 중 하나였다. 페기 갤러리는 유럽 작가들뿐만 아니라 미국 예술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 등 이들을 묶는 하나의 가교였다. 급진적인 예술가들을 주목하는 것 이외에도 페기의 뉴욕 갤러리가 더욱 더 예술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점은 바로 독특한 전시 연출이었다. 건축가였던 프레데릭 키슬러(Frederick John Kiesler)와 페기는 전시장의 작품을 마치 떠있는 것 처럼 가는 막대에 매달았다. 관람자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손으로 만지고 조명을 비추는 쪽으로 돌려서 관람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녹음된 기차 소리가 흘러나오거나 작품을 비추는 조명을 깜빡거리게 만들며 공감각적인 자극을 주었다. 페기 갤러리의 전시 연출은 당시 화이트 큐브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기존의 통념을 깨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항상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던 페기는 멈추지 않고 예술계에 굵직한 성과와 업적을 남겼다. 페기는 유명해지기 이전의 잭슨 폴록을 포함해 예술가들을 향한 금전적인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페기는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잠재적인 능력과 발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굳건한 신념을 가졌다. 또한, 1943년에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도로시아 태닝(Dorothea Tanning),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등 미국과 유럽의 여류 화가만을 초대해 '여류 화가 31인전(31 Women of Peegy Guggenheim)' 전시를 개최했다. 해당 전시는 남성중심적인 예술 세계에서 시대를 앞서간 기획이자 매우 상징적인 전시였다.

 

한편, 페기는 더 부유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1947년 뉴욕의 갤러리를 닫고 페기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이동했다. 유럽으로 다시 넘어간 페기는 삶을 마감할 때까지 예술을 향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소장품을 보관할 수 있는 대저택을 구한 페기는 삶의 터전을 정착해가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최된 비엔날레에 자신의 소장품을 대여해준다. 이후 페기는 솔로몬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 즉, 삼촌의 재단에 소장한 컬렉션 모두를 기부한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여러 작품들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페기의 기부 덕분이다. 페기는 긴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수집했고 꽤나 현명한 선택을 이어나갔다. 페기는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에 기부한 모든 소장품 가운데 100명이 넘는 화가의 작품 326점을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에 남아있게 만들어 사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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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의 대사 中

"예술가들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인류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 걸로 충분하다."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 영화는 편안한 페기의 목소리와 함께 마치 콜라주를 이어붙이듯 여러 예술가의 작품 이미지와 예술계 인사들의 인터뷰, 각 시대의 조각 영상이 함께 삽입되어 전개된다.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책처럼 이 영화를 통해 페기의 인생사는 물론 20세기 초 서구 사회의 미술사까지 간략하게나마 훑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창작하는 예술가만큼 수집가와 후원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영화였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어 내더라도 전시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더라도 미술사 속에 편입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수집하고 잘 보관하는 것, 그리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를 향한 후원이 이후 인류에게 역사에 남을 좋은 작품을 물려줄 수 있게 만든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 미술의 역사는 매번 같은 모습을 한 적이 없었다. 뒤샹이 변기를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한 것도, 피카소가 모든 사물을 파편화시킨 것도 당시에는 용납되기 힘든 파장이며 일종의 반항에 속했다. 페기 역시 일반적인 방식을 따라갔던 적이 없다. 항상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냈으며 기존의 관념을 깨뜨렸다. 페기라는 한 개인의 놀라운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매 순간 본능적인 선택은 너무 싱거운 순간이 많았던 자신을 돌아보며 자문하게 만들었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에 대해 후회 없는 신념을 밀어붙인 순간이 있었는지.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를 통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먼 인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하는지. 한 해를 마무리하며 과감한 선택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며 글을 맺는다.

 

 

[손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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