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동행하겠습니다. -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공연]

당신은 어떤 기억을 갖고, 어떤 기억을 버리고 싶나요?
글 입력 2021.11.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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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1926년 그라첸 박사의 대저택 화재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유모였던 메리 슈미츠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장면인 overture에서 간단한 줄거리를 알 수 있다.


주인공인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 네 남매는 화재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유모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된다.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각각 다른 집에 입양되어 자라게 된다. 12년 후, 맏형 한스가 남매를 한곳에 모으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스는 메리를 화재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하고, 남매의 기억을 한데 모은다.

 

남매의 기억 조각이 맞춰질수록 관객은 아이들이 살았던 동화 속이 실은 잔혹동화임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나치 정권의 실험도구였다. 메리는 그 실험의 연구조교였고, 아이들의 신뢰를 얻어내어 기억을 지우는 최면을 거는 역할을 했다.


극이 진행되면서 네 주인공의 어릴 때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번갈아서 나오게 되는데, 그 간극이 사건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어린 헤르만은 어느 날 수요일마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넘버 ‘Silent Wednesday’이다. "어제는 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이상해 내가 뭘 했지. 사라진 기억." 아이들은 수요일마다 자신들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달아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수요일, 그날의 실험대상은 안나였다. 자세한 실험 내용은 묘사되지 않지만, 관객들은 그라첸 박사가 안나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절규한다.


막내 요나스가 그라첸 박사를 밀어 넘어뜨리면서 그를 죽이게 되는데, 요나스가 충격에 빠진 모습을 보고 헤르만이 나서서 박사의 사체를 난도질하고는 자신이 박사를 죽인 것이라고 한다. 첫째 한스 역시 그에 동조하며 ‘아버지는 헤르만 형이 죽였다.’고 말하게 한다. 결국 아이들은 박사의 사체를 숨기기 위해 불을 지르기로 하고, 그 와중에 메리가 들어온다.


아이들은 메리를 경계하지만 메리는 박사의 공범으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후회하며 아파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내 천사들에게. 내가 대체 왜 고통 속에 너희들을 춤추게 했나. 신이여 날 용서하지 마소서." 메리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아이들의 기억을 최면으로 지워준다. 사실은 이렇게 후회할 것이었다면 이미 멈추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기억은 다시 되살아났고, 메리가 유서에서 일러준 곳으로 간 아이들은 또 기억을 지우겠냐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내게는 이 대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갖고, 어떤 기억을 버리고 싶나요?



블랙메리포핀스는 대학로에서 꽤 오래 흥행한 작품이다. 아이들이 겪은 사건은 분명 잔인하고 피폐하기 그지없는 사건이다. 보고 있는 내가 다 힘들 정도로 아이들이 겪기에는 힘든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 기억을 피하지 않고 맞서기로 한다. 행복한 기억만을 남겨두기보다는 불행한 기억 또한 지고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바로 이 때 한스가 한 말이 이 작품을 흥행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불행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행복만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은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얼음장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불행한 기억이 튀어 올라 얼음을 깨버리면 그대로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한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은 온전한 감각을 가지고 돌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아무리 돌이 널려있어도 피해 내디딜 수 있고 혹시 몰라 걸려 비틀거린다 해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또, 설령 넘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온전한 행복을 위해서는 온전한 기억이 필요하다.

 

 

[정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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