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아 - 연극, 리처드 3세를 찾아서

글 입력 2021.11.2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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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에 실패했다.

 

오랜 시간 내 스스로 문답하며 내린 끝, 결론은 결국 가장 내키지 않는 이 말로써 맺는다. 나는 아무래도 극의 중간 어딘서부턴가 길을 잃었다. 미아가 된 것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극에 대해 무슨 한 줄의 평을 쓸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잃은 길을 되짚어보며 리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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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핵심 제재는 단연 리처드 3세이다. 형을 탑에 가둬 죽인 자. 조카를 폐위시켜 왕이 된 자. 곱추. 모략가. 죽어선 묫자리 하나 못 얻고선 수도원 어딘가에 묻혀버린 자. 극의 소재가 될만한 서사를 가진 인물이다. 묫자리 하나 얻지 못하여 수도원 아래에 묻혔다간 5세기 동안 땅속에 잊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추악한 유골을 발견해내는 것으로 극은 시작한다.

 

무대는 캄캄하다.

 

서울 하늘 아래 모 주차장 인근의 화장실, 그 아래로 수없이 많은 인간의 오물이 퇴적된 낮고도 낮은 곳에서 그는 발견됐다고, 나레이터는 조용히 말한다. 만성 척추측만증으로 굽어진 이 유골에는 리처드 3세의 상상을 투영하기 좋다. 영국인인 그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가장 낮고도 더러운 곳에서, 추악했던 그의 유골이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 좋다. 나레이터의 텅 빈 목소리가 어둠을 천천히 채워 들어오고, 좌우 정면 3개의 아날로그 모니터에는 즉석 녹화 중인 캠코더 영상이 전시되고 있다.

 

골목길과 교회와 빨간 십자가, 그리고 목욕탕 굴뚝을 가지고 있는 어느 비루한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 발굴된 리처드 3세의 소문을 떠든다. 흉측하고 추악한 그, 사람들은 그를 그려보며 그의 추악함을 욕하고, 또 칭찬한다. 흉측해, 더러워, 추악해, 매력적이야, 신비로워, 어딘가 궁금해, 이런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떠들며 점차 그들은 리처드 3세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그의 상상에 빠져가다간 이곳에 16세기 런던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저쪽 목욕탕 굴뚝에 시계탑의 환상을 걸어두곤 주민들은 각자의 리처드 3세를 상상한다. 영국인의 유해가 그러하였듯, 아무런 상관이 없고 경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다만 우리 안의 이 흉측하고 추악한 배덕감을 추적해보기 위하여 상상은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리처드 3세를 찾아서, 리처드 3세를 그리어본다. 아마 우리 안의 그를 찾기 위하여 그를 연극해보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적인 언어와 몸짓으로. 그것은 특유의 고양된 목소리와 각종 미사여구, 그리고 웅변하듯 잔뜩 펼쳐진 몸짓들이다. 좀 전까지 런던을 소환하던 주민은 어느새 16세기 영국인이, 각자의 리처드 3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서울은 지워져 있었다.

 

결국 여기 즈음부터 어두운 무대 위로 흐릿하게 전개되어가던 길은 지워진다. `여기, 그리고 지금`이 지워지니 남는 것은 영국인, 그리고 셰익스피어뿐이다. 연극 `리처드 3세`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딱 이 연극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퍽 기껍다. 아직 그 안, 서울과 한국인을 찾으며 미련하고 있던 나는 셰익스피어의 언어들과 몸짓 사이에서 서사의 끈을 놓쳐버린다.

 

결국 연기자와 각본에서 `여기, 그리고 지금`의 표지가 지워지고 나니 남는 것은 연극 `리처드 3세`뿐이다. 그러나 왜 5명의 리처드 3세가 있어야 했는지 이해하기란 내게 어렵다. 각 인물이 상정하는 5개의 추악한 욕망을 캐치해내기엔 내 안목이 짧았던 탓이리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해 밟아 지난 여정들을 따랐으나, 그의 내면을 좇지 못했다. 즉 그는 끝내 이해되지도 공감되지도 못한 채 내게서 한없이 먼 존재, 순수악으로써만 닿았다. 난 5명의 리처드 3세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들 안의 리처드와 내 안의 리처드를 찾아내지도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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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란 어떤 인물이었을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가 어떤 천성을 안고 나, 어떤 경위로 그러한 인간이 되어갔는지도, 나아가 그를 이해함으로써 공감하지도, 비교함으로써 동화되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그렇게 태어난 악인으로써만 이해된다. 세 치 혀를 그럴 듯 놀리는 추악한 욕망의 존재자로. 극은 한없이 낯설게만 날 맴돌았다. 이해치 못한 전개, 이해치 못한 인물과 서사, 그리고 과장된 언어들까지. 참으로 풍부하게 낯설었다. 리처드 3세의 기괴한 욕망의 정도만큼 배우들의 몸은 뒤틀린다. 입으로 쉴 새 없이 뱉는 대사와 수사, 그리고 마음껏 꿈틀대며 표현되는 배우들의 몸은 너무도 `극적`이었다. 사실극이 아닌 정통 비극, 극성이 드높으니 사실성은 가리어진다.

 

왜 서울이었어야 했는가, 왜 서울에서 그의 유해는 발견되었어야 했으며, 왜 여기 런던의 종탑은 소환되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서울인들이 시도해본 영국인 리처드 3세, 본 극을 이렇게 평하고 싶다. 즉, `골목길 느와르`라기에는 골목길이 없었고, 서울이 없었고, 그 시도만이 내게 읽힌 것이다.

 

이러한 전처로 나는 이 짧은 낱말을 뱉는다. 관극에 실패했다. 배우들의 열연, 풍성한 몸의 언어, 신선한 연출 등에 감탄하였으나 서사와 주제 의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획책에 실패하였기에 이번 리뷰에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많이 없다. 서사에 대하여서는 길 잃은 리처드 3세의 유해, 길 잃은 서울의 사람들, 그리고 길 잃은 내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본 극이 가지는 관극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안의 리처드 3세를 끌어내기에는 서사의 힘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만, 본 극이 지니는 연출적 매력이 우리 눈을 사로잡아 관극을 마무리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서 출발한 연극은 한없이 어둡다. 무대도 응당 어두웠고, 초반 완전한 어둠 속의 관객을 나레이션과 극 연출의 힘만으로 이끌어간다. 작은 불빛들을 제한적으로 비춤으로써 장면의 집중도는 매우 높았고, 객석과 다른 관점에서 녹화되는 배우들의 얼굴은 캐릭터의 여러 면모를 동시에 감상케 하며, 여러 상상을 떠올릴 수 있게 했다.

 

비극 특유의 어조, 연극 투의 언어는 낯설지만, 관객은 그 앞에서 언어를 새로이 마주하게 된다. 더하여 강렬하게 표현되어 전시되는 배우들의 몸짓들은 이 낯선 언어에 대한 체험을 더욱 강렬히 새기었다. 그들의 몸짓은 말하자면, "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하는 햄릿의 고뇌를 보다 확대하여 표현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 괴로움을 더 통렬히 표현하기 위하여 생생히 뒤틀리는 몸짓을 닮았다. 그들이 무대에서 선보인 몸짓은 언어와 별개로 무대에 존재하는 표현 양식으로 보아 무방하다. 두 가지 표현이 하나의 배우로부터 표출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짓게 될 우리의 오묘한 감상이 또한 본 극이 가지는 관극의 가치 중 하나이다.

 

본 극을 관극하실 분이라면 필히 리처드 3세의 역사적 사실, 내지는 연극적 서사를 양지하시고 이리 찾아오시길 바란다. 그들의 유장한 언어와 몸짓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서, 그를 수월히 즐기시며 서사의 흐름을 좇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을 탑재하셔야 무탈할 것이다. 셰익스피어 인물들의 열정과 언어, 그리고 몸짓으로 각색해낸 리처드 3세의 극, `리처드 3세를 찾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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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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